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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an 18. 2022

추억을 그리워하는 이에게...

영화 <고스트 스토리> 리뷰


시간을 잃다     

  한적한 초원 위에 펼쳐진 고요한 자연과 어울리는 오래된 하얀 목조주택이 있다. 이 곳에 애틋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산다. 단지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다면 음악을 하는 남편 C는 이 외딴 집에 머물고 싶어하지만 아내 M은 이곳을 떠나 조금 더 현대적인 집으로 이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바뀌어도 계속 이 집에 있었던 피아노를 이사하면서 가지고 가고 싶은 M과 오래된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C. 고집스런 M은 혼자 움직이기에는 버거워 보이는데도 그동안 쌓여있던 책들을 관(棺)을 연상하게 하는 무겁고 단단한 오래된 나무 상자에 넣어 혼자 힘들여 밖으로 내다 버린다. 오래된 이 집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를 다그치는 아내에게 C는 선문답처럼 ‘history’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찬찬히 화면을 보면 집의 거실은 사각의 오븐과 주방 서랍, 네모난 레코드 커버안의 둥근 레코드와 사각의 천장에 매달린 둥근 선풍기, 직사각형의 식탁위에 둥근 과일이 담긴 둥근 바구니가 놓여있는 조화로운 공간이다. 곡선과 직선을 아우른 이 집은 그 자체로 무한한 시간을 이어온 '역사'의 기품을 안고 있다.    

 

 결국 M의 주장에 C가 양보하여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고 부부가 얼굴을 맞대고 잠이 든 밤. 피아노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치는 불협화음이 들린다.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불길함의 징조인 듯, 원인을 알 수 없는 피아노의 굉음이 주는 공포의 분위기와 거실의 유리와 벽면을 살짝 싸고 도는 프리즘빛.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오컬트적 유령영화도 아니고 애틋한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도 아니다. 판타지 영화인 ‘그린 나이트’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 했듯이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고스트 스토리’를 통해 ‘삶 안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이란 과거와 미래의 그 어느 중간쯤에서 서성이는 것이라고. 어쩌면 진부한 명제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아름답고도 시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이 명제를 우아하게 풀어낸다.    

  

 다음 날,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C가 죽게 된다. 그것도 바로 내 집 앞 작은 교차로에서. 직선으로 구분하고 정한 질서는 때로 폭력적인 기호가 된다. 집이 안고 있는 ‘역사’를 양보한 C의 희생이다. C는 병원 영안실에서 아내 M이 죽은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덮어준 시트를 그대로 덮어쓰고 일어나 유령이 되어 마치 미풍을 타고 가듯 천천히 우아한 걸음으로 집 앞 너른 초원을 가로질서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가 된 아내 M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손을 얹지만 유령의 손길을 느낄 수 없는 M. 유령은 그저 안타깝게 아내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대사도 없고 몸의 움직임도 거의 없이 시트에 뚫린 두 개의 검은 구멍만으로 아내를 지켜보는 유령의 슬픔을 기이하게도 관객은 오롯이 공유한다.    

   

 뜬금없는 남편의 죽음. 음식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혼자가 된 M에게는 그저 하나의 무의식적 행위에 불과하다. 아내는 이웃 친구가 위로의 마음을 담아 전한 파이 한 접시를 난도질하듯 포크로 거칠게 찍고 부수어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 넣지만 곧 모두 토해낸다. 아무런 대사나 눈물도 없이 5분여에 걸쳐 롱 테이크로 진행되는 M이 파이를 폭식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M이 견디는 고통에 깊숙이 몰입하게 한다. 공감의 밀도는 언어보다 침묵, 소란함보다 고요함 안에서 숨막히도록 촘촘하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남편을 잃은 상실감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던 M은 시간이 흐르자 부쩍 외출이 잦아졌고 마침내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아 이 집을 떠난다. 그것도 미련을 남긴 느린 걸음이 아니라 무엇에 쫓기듯 바쁜 걸음으로 문밖을 향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떠난 빈 집을 떠나지 못한 채, 유령은 작은 공간 안을 조용히 오고 간다.   

   

과거를 기다리다     

  아내가 없는 집에 왜 유령은 남아 있을까?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아내는 이사를 할 때마다 이전 살았던 집 벽 모퉁이에 작은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고 C에게 말한 적이 있다. 과거를 기억할만한 추억을 남긴 메모지. 그러나 그녀가 떠난 집에 다시 돌아온 적은 없다고 말한다. 어김없이 이 집을 떠날 때도 아내는 집 코너 틈 사이에 작은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 그러나 아내가 떠난 뒤, 시트 안에 가려진 손가락으로 메모지를 꺼내려는 유령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유령의 실패는 메모지가 은유하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꺼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시간을 떠난 유령에게 시간은 둥그런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눈 인간 세계의 선형적 시간을 떠난 유령의 둥근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고 앞과 뒤도 없으니 유령에겐 아예 ‘과거’라는 의미 자체가 없다. 과거가 과거인 줄 모르니 유령은 이미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무용한 기다림인 줄 유령은 알 리 없다.

     

  비록 작은 공간에 홀로 남아 있지만 유령의 둥근 시간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수십 년을 앞서 가기도 한다. 어느 순간 유령은 서부 개척 시대 개척자 가족이 자신들이 정착할 영역을 선언하듯 C와 M이 살았던 집 공간 근처에 사각으로 말뚝을 박는 것을 본다. 가족의 망내 딸인 듯한 글자를 아직 모를 나이인 어린 소녀가 뭔가 쪽지에 그림을 그려 들판 작은 바위 밑에 숨긴다. 그러나 곧 그 가족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모두 몰살당한 채 처참하게 누워있다. 죽은 소녀는 해골이 되어 땅에 누워있다. 소녀가 남긴 메모지를 덮었던 바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종이는 흙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을 기억할 누구도 없으니 그들의 삶은 아예 없었던 듯 묻혀버렸다.     

 

  C의 옆집에도 유령이 산다. 두 유령은 소리 없는 언어로 소통한다. 어느 날, 두 유령이 머물렀던 집터에 포크레인이 들이닥쳐 집들을 무너뜨린다. 그 충격의 순간, 옆집의 유령은 “그들은 오지 않을 모양이야”(They’re not coming.)라는 말을 하며 바닥에 시트만 남기고 사라진다. 꽃무늬 옷을 입은 옆집의 유령이 기다린 ‘they’는 누구일까? 유령은 꽃무늬 옷을 입고 있었던 개척민 망내 소녀인지도 모른다. 가족이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소녀 유령의 기다림은 허망하게 끝이 난다.      


시간을 끌어안다.     

  그럼에도 C는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토록 떠날 수 없는 집이 들어섰던 공간은 결국 불도져에 의해 무너져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대신 초고층 오피스 건물들이 들어선다. 시간을 나누듯 사각으로 나뉜 수많은 창, 기하학적으로 얽힌 복도들과 방. 빌딩의 미로에 갇힌 유령은 자신이 아내와 함께했던 공간조차 찾을 수 없다. 유령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한 눈에 보이는 그 빌딩 옥상에 올라 낙하한다. 무게를 가진 실체가 없으니 낙하로 인한 유령의 죽음은 없다. 그저 땅을 향해 갔을 뿐이다. 아내 M이 돌아올 그 집이 있는 땅. 다시 돌아온 유령은 살아있는 동안 M과 함께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기도 하며 그동안 꺼내기에 계속 실패한 아내의 메모지를 다시 꺼내기 위해 애를 쓴다. 마침내 C가 M이 남긴 메모지를 꺼내기에 성공하고 메모지를 펼쳐 일별하는 순간, C는 풀썩 주저앉듯 둥그런 모양으로 커다랗게 바닥에 펼쳐진 시트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M이 영안실에서 덮어준 사각형의 시트는 죽은 C의 영혼을 둥그런 모양으로 덮고 있었던 것이다.   

  

  메모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그 메모지에는 새 삶을 찾아가는 M이 자신이 머물렀던 이곳의 추억을 담아놓았을지도 모른다. 혹여 다시 돌아온다면 기억할만한 C와의 추억. 예측하지 못했던 죽음이 찰나의 순간에 들이닥쳤듯이 유령은 메모지를 본 순간 유령의 시간과 어긋난 세상의 시간을 기억해 낸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둥근 유령의 시간이 잊었던 것은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지상의 직선적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지상의 시간과의 이별을 받아들였던 유령은 소멸한다. 완벽한 이별이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짚었던 데이비드 로워리의 ‘고스트 스토리’는 역사란 그리 거창하지 않은 시간의 물결이고 우리의 삶이란 그 어느 중간쯤에서 서성이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C가 M에게 양보했던 집은 바로 그 집에 깃든 조화와 역사를 사랑했던 C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과거와 추억을 잃은 M의 미래는 다시 돌아와 되찾지 않을 메시지를 예리하고 길게 난 벽 모서리에 남긴 것처럼 쓸쓸하고 차갑기만 하다. 그렇지만 프레임의 모서리를 둥글린 1.33:1의 스크린에 담았던 로워리의 연출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에게 화면 그 자체로 따뜻하고 우아한 ‘중간의 미학’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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