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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Feb 12. 2022

시간을 떠다니는 흔적들

영화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 리뷰

     우리의 기억이란 얼마나 믿을만할까?  지금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기억 중 대부분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절대로 안잊을것 같이 선명했던 어제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 흐려지거나 아예 잊혀지기도 하는 경우를 종종 보며 우리는 기억이 얼마나 불명확한 것인가를 실제로 경험하기도 한다. 

  조던 해리슨의 원작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를 영화화 한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은 기억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인공 3명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공지능인 홀로그램으로 불러낸다. 만질 수는 없으니 홀로그램의 역할은 대화의 상대가 되어 지난 시절의 기억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회상이라고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재구성되거나 심지어 거짓이 되기도 하는 기억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바다와 같다. 물은 물이지만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일 수가 없는 바다를 닮은 기억의 물결로부터 영화의 화면이 열린다.


수정된 과거

  영화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은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밀려 나가는 바닷가에 세워진 고급스런 저택이 배경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바다로 난 저택 베란다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마조리(로이스 스미스)가 돌아서서 거실로 들어간다. 그때 베란다 공간 반짝이는 벽면에 되비치는 마조리의 모습. 기억은  실제 같지만 결국 실제가 아닌 거울에 비친 환영(복사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수없이 오고 가며 모래알을 쓸어나가는 바다의 파도처럼 인간의 기억도 그렇게 세월에 흐름에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수정되거나 유실되어 간다. 그래서 영화에서 기억의 뒤끝에 마조리가 되내이곤 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말은 흐려지는 기억들 뒤에 남는 자기 위로같아 보인다. 마조리의 자기 위로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수정되거나 심지어 자식을 잃은 고통마저 잊혀진 기억의 결과물이다. 마조리의 딸인 테스(지나 데이비스)의 말저람 "기억은 서랍장에 파일처럼 쌓인 것이나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의 제일 마지막 부분, 복사본의 복사본인 것"이며 그래서 이제 죽음을 가까이 둔 마조리의 모습은 아무런 고통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기억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끝에 원본조차 흐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치매로 인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85세의 마조리가 복원된 40대의 젊은 모습의 남편인 인공지능 월터 프라임(존 햄)과 대화하는 거실 장면이다. 대화는 강아지 토니의 이야기라든지 월터가 마조리에게 했던 청혼의 순간 등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과거의 일상이나 경험에 대한 것이다. 인공지능은 대화를 통해 기억을 입력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하기에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주로 실제 인간들이다. 마조리가 회상하는 기억에서 월터는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이라는 영화가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고 있는 모텔방에서 벗은 몸으로 마조리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청혼을 한다.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못내 초라한 청혼이 마음에 남았던 듯 마조리는 ”그 청혼이 오래된 극장에서 ‘카사블랑카’를 보고 오는 길에서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을 한다. 이 대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공지능인 월터 프라임이 과거 마조리가 받았던 청혼의 기억을 고풍스런 카사블랑카의 이야기로 바꾸게 되는 거짓 회상으로 이어진다.     


  노환인 만큼 식욕을 잃은 마조리에게 월터 프라임이 계속 권하는 것은 '한 스푼의 피넛버터'이다. 이는 맛과 구성 성분은 남아있지만 갈리고 다른 재료들과 뭉게지면서 원형의 모습이 사라진 땅콩처럼 기억도 그 본체를 찾을 수 없는 수정물임을 은유한다. 예를 들면 마조리는 애완견이었던 토니가 죽고 나서 새로 입양한 토니 2에 대한 회상에서 딸인 테스가 입양소에서 죽은 토니와 닮았던 토니 2를 선택했다고 인공지능 월터에게 이야기 한다. 마조리의 말처럼 닮았다고 해서 토니2가 토니 1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토니 2를 선택했던 것은 딸 테스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자살한 아들 데미안이였다. 자기 방에서 은둔하였던 데미안의 우울증을 엄마가 따뜻하게 케어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아들을 잃은 슬픔은 마조리의 기억에서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수정된 것이다. 심지어 치매로 인해 테스에게 ”데미안 자고 있니?“라고 묻기도 한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과 고통은 아들이 딸로 치환되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아들이 여전히 마조리 곁에 살아 있는 엉뚱한 상황으로 변하기도 한다. 시간이 아픈 엄마의 상처를 마음 깊숙이  묻어버린 때문이리라.


치유받지 못한 상처

  마조리가 죽은 후 다음 장면에서는 테스가 죽은 엄마 마조리의 홀로그램을 마주하고 앉아 대화를 한다. 마조리가 살아 있을 때 인공지능인 월터와의 대화에 대해 못마땅해 왔던 테스였던 터라 의외의 상황이다. 마치 아버지인 척하는 월터 프라임도 싫고 여전히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월터 프라임에게 빼앗기고 있는 듯한 상실감이 테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테스가 엄마 마조리의 홀로그램을 마주한 이유는 자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도 어린 시절 엄마에게 느꼈던 소외감과 미움을 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내내 마음에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자식의 죽음 때문에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마조리가 곁에 남은 6살 딸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로 인해 성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울증에 힘든 딸의 마음을 모른 채 마조리는 세상을 떠났다.  테스의 마음을 아는 것은 남편인 존(팀 로빈스)뿐 이었다. 그러나 존의 사랑도 테스가 우울증으로 무너져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만약 엄마 마조리처럼 더 오래 살았더라면 엄마처럼 고통의 기억이 우물같은 마음 깊숙히 잠겨버리거나 흐려짐으로 인해 삶을 그토록 안타깝게 끝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과 무기력에 빠진 존은 테스의 홀로그램을 불러내어 대화를 시도하지만 곧 포기한다. 오랜 전, 인공지능과 이야기 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한 테스의 말을 존도 이제 이해한다. 그저 입력된 프로그램을 저장한 인공지능에 불과한 테스 프라임에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음에 존은 더욱 절망한다. 아내를 떠나보낸 후 시간이 그리 흐르지 않았으니 존의 모습은 상실감과 고통으로 완전히 침몰한 듯 어둡고 무겁다.    

 

  시간이 흘러 존은 테스의 딸 레이나가 입양한 10살 소녀를 인공지능 테스와 만나게 한다. 증조 할머니의 이름을 이어받아 ‘마조리’가 이름이지만 이미 죽은 월터, 마조리, 테스를 본 적도 없는 이 소녀는 가족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대신 소녀는 테스 프라임에게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분류학으로 손에 들고 온 노란 단풍나무를 영리하게 설명한다. 불완전한 기억의 복사가 아니라 실제하는 나뭇잎을 이분법을 차용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소녀는 이제 이 가족을 붙들고 있었던 불안정한 과거의 기억의 자리를 대신할 것 같지 않다.    

 

사라진 기억을 대신한 이미지들의 조각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녀 마조리의 미래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늙고 병든 모습의 존의 곁을 성장한 손녀 마조리가 조용히 지키고 있다. 이렇게  성년이 되가는 소녀 마조리의 기억에도 점차 가족이 가졌던 고통의 모습이 남겨질 것이다.     

  이어서 존의 죽음을 암시하듯 이제 바닷가 저택에 남아 대화를 나누는 것은 월터, 마조리, 테스의 홀로그램들이다. 세 인공지능 중에서 가장 많은 기억이 주입된 월터 프라임은 대화를 주도하며 카사블랑카 공연이 끝난 후 고색이 가득한 극장 앞에서 마조리에게 청혼을 했다는 과거의 회상을 늘어놓는다.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대신 기억이 주입된 인공지능들이 복사를 거듭한 끝에 사실처럼 수정된 마지막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클로즈업 된 세 개의 이미지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돌아가며 화면을 채운다. 존이 테스와 키스를 나눌때 배경이 되었던 미술관의 그림들, 마조리와 월터가 머물렀던 모텔방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에서의 카메론 디아즈의 얼굴,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던 월터의 앞에 놓인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던 센트럴 파크의 휘날리던 눈부신 샤프란빛의 깃발이다. 결국 사람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에 남는 것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한 순간 눈에 잡혔던 이미지들의 조각들이며 복사를 거듭하며 수정된 말의 조각들이다. 토니1과 토니2가 거의 비슷하지만 같다고 할 수 없듯이 그리고 테스 친구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20년을 비슷하게 아버지의 말을 흉내 낸다는 앵무새의 소리처럼 흉내내기를 반복하는 긴 세월동안 달라지거나 심지어 거짓이 된 기억의 조각들은 세상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우리의  빈 자리를 쓸쓸하게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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