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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Feb 23. 2022

끝이 아니라 시작인 막다른 길

영화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리뷰

   

  일컬어 ‘고전’이란 문학이나 예술을 망라하여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들이다.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제작이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페미니즘 로드무비로서 확고한 고전의 자리를 가진다. 얼마 전 사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노인 여성의 성적 학대의 문제를 이야기한 <60세>를 리뷰에 올렸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나라와 문화적 배경만 달랐을 뿐, 남성들의 폭력에 정당한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변방으로 내몰려 가는 여성들의 험난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종 조용하고 어두웠던 <69세>의 여주인공과는 달리 <델마와 루이스>의 시작은 두 여성이 각자 문제가 있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경쾌하고 밝다. 그도 그럴것이 친한 친구 사이인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드)는 모처럼 만에 여행길을 나서기 때문이다.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일박이일에 불과한 짧은 여행길임에도 식당일에 지친 루이스와 가부장적인 남편(크리스토퍼 맥도날드)이 무서워 말 대신 작은 메모를 남기고 집을 떠난 델마는 해방감과 흥분으로 들떠 있다. 그러나 캠핑도 하고 낚시도 할 거라는 야심 찬 희망에 부푼 여행은 곧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경찰에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아내를 집안의 장식품처럼 붙잡아 두는 강압적 남편 때문에 처음으로 집을 떠난 여행을 처음 나선 델마는 마음이 들뜬 나머지 여행길 중간에 들른 작은 마을의 술집에서 한 건달이 권하는 술을 거푸 마셔 취한 채로 놀게 된다. 결국 남자의 완력에 의해 주차장으로 끌려온 델마는 저항을 하지만 폭력을 당하고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나타난 루이스가 총을 겨누며 델마를 구해내지만 남자가 내뱉는 성적 희롱에 순간 화가나 총을 쏘고 남자는 죽게 된다. 

  

  이때 겁을 먹은 델마가 경찰서에 가자고 했지만 루이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술집에서 흐트러진 자세로 술을 먹고 남자랑 춤을 추며 헤픈 모습을 보였던 델마의 결백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목격자나 증거 또한 없으니 법적으로도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루이스는 알았던 것이다. 사실 총을 쏘았던 루이스는 자신도 텍사스에서 똑같은 성적 폭행을 당했던 트라우마로 인해 자제할 틈도 없이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살인범이 되버린 루이스와 델마는 국경을 넘어 멕시코를 향해 간다. 가던 중 학생인 척 하는 매력적인 한 남자 제이디(브래드 피트)를 만나게 되어 델마의 설득에 내키지는 않지만 루이스는 그를 차에 동승시킨다. 결국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는 제이디는 델마를 속여 그녀들이 도주를 위해 준비한 6천7백불을 훔쳐 달아난다. 그 돈은 루이스를 사랑하는 지미가 애써 마련해서 그녀들이 있는 곳까지 가지고 온 소중한 돈이었다. 이제 돈 한푼 없이 된  두 여성의 도주는 사면초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타이틀이 <델마와 루이스>인 만큼 영화에서 좀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은 델마의 자기 변화이다. 마치 한 마리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와 세상을 날 듯 소심하고 산만하기 그지 없었던 델마는  남자들의 성적 폭력과 사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깊게 웅크리고 있던 야성이 튀어나오게 된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 그토록 밝고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남자에게 맞고 나서도 머리를 매만지던 델마의 변화는 스스로 “나 이렇게 깨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모든 게 달라보여”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성공 가능성이라고는 0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도주의 질주 중에 두려움보다는 지금까지 억눌려 왔던 자기 자신의 발견에 델마는 한껏 고양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호한 리더의 역할을 하던 루이스와 그저 철없는 사고뭉치에 불과했던 델마의 역할이 이 지점에서 뒤바뀌게 된다. 이제 멕시코로 갈 기름값조차 없어 낙심하고 우는 루이스에게 델마가 단호하게 걱정 말라고 한다.  곧 델마는 근처 상점에 들러 총으로 손님과 주인을 위협하고는 점잖게 6천7백불을 갈취해 나온다. 강도라고는 하지만 점잖게 미안함과 예절을 갖추며 돈을 갈취해 나오는 수법은 지난번 자신들의 돈을 훔쳐간 사기꾼 제이디가 허풍삼아 떠든말을 들은 대로 시현한 것이었다. 이 장면은 상점 카메라에 모두 찍히게 되고 그것을 본 슬로컴브 형사(하비 케이틀)는 여성들의 돈을 훔친 죄로 마침내 잡힌 제이디에게 "그녀들에게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네놈이 망쳤다"고 화를 내보지만 남성에겐 반성의 기미란 없다. 이 형사는 두 여성이 남성들의 폭력과 성적 희롱,  거짓말로 인한 희생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짐작하고는 어떻게든 두 여성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다.       


  이제 델마와 루이스는 도망자의 초조함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 가는 신나는 여행자가 되지만 그녀들을 가로막는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멕시코로 달리던 중 속도위반으로 쫒아온 경찰관을 델마는 총으로 위협하고 경찰을 경찰차 트렁크에 가두고 달아난다. 뒤이어 델마와 루이스는 같은 방향으로 도로를 달리던 커다란 덤프 트럭 운전사의 성적 희롱을 다시 당하게 된다. 결국 유조차의 탱크를 폭파시키게 되는 델마와 루이스. 그야말로 아드레날인이 치솟은 델마는 남편과의 희망이 없었던 삶을 떠올리며 "이래도 저래도 엉망이 됐을 것이니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고 말한다. 델마의 그런 태도에 루이스도 어쩌면 그렇게 긍정적인가를 되묻는다. 델마는 루이스에게 넌 돌아갈 곳도 있지만 난 뭔가를 이미 건넜고 돌아갈 수도 없고 그냥은 살 수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한다. 루이스도 "세상에 얼굴 나오면서 끝나고 싶지 않다"고 하며 두 여성은 자신들을 뒤쫒는 경찰들에게 투항하지 않을 것을 묵시적으로 약속한다.     


  결국 신나는 음악과 함께 수십대의 경찰차들과 그랜드 캐년 협곡 사이의 공중을 도는 헬리콥터가 그녀들이 모는 1966년 모델 초록색 ’선더버드‘(Thunder Bird)를 뒤쪽는 격추신이 화면을 압도한다. 모래 바람이 일도록 속도를 가하며 추격하는 경찰차들과 장애물들을 부수고 뛰어넘고 옆길로 접어드는 선더버드의 탈출신은 지금까지도 영웅적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적 통례를 뒤집는 여성 버드 무비의 전설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 델마는 “나 이렇께 깨어 본적이 없는 거 같아. 모든게 달라보여”라며 오히려 위기에 처한 자신의 삶에 희열을 느낀다. 더욱이 루이스에게 "새로운 게 우릴 기다리고 있는거 맞지?" 라며 동의를 구하는 델마. 그러니 “우리 잡히지 말자”, “Let’s keep going”이라는 델마의 말대로 루이스는 힘차게 선더버드의 엑셀을 밟는다.   

   

  살건지 죽을건지는 우리가 결정하자는 결의를 마치고 델마와 루이스는 두 손을 꼭 잡는다. 그 순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같았던 그 거대한 그랜드 캐년의 낭떠러지 공간으로 선더버드가 나른다. 생의 마지막 순간 드디어 그녀들은 그야말로 신화적 푸른 새가 되어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의 풍경 속으로 자유롭게 비상한다. 스냅샷같은 정지 화면으로 끝나는 이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아름답도록 담대하지만 한편 그녀들을 지상에서 내몰았던 비열한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그녀들의 삶에 가슴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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