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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12. 2022

환상의 나라 건너편에 사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리뷰

  영화가 열리면 한 아이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뛴다. 플로리다의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3층 콘도 복도 발코니에 모인 아이들의 놀이는 모텔 마당에 주차한 차를 향해 침을 뱉으면서 거친 욕을 해대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나쁜 행동인지 전혀 모르는 아이들의 그저 재미있는 놀이. 분명 귀엽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지만 방임된 채 살아가는 아이들. 이 영화는 이 아이들의 삶이 그저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환상적인 꿈의 동산, ‘디즈니랜드’ 곁에 외양만 원더랜드인 ‘슬럼가’가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빈곤한 삶의 처지에 있는 그들의 삶을 판단하거나 동정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도 무지개처럼 빛나는 사랑과 행복, 우정이 있음 또한 보여준다. 동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보라색, 노란색 의 궁전 같은 모텔. 그렇지만 이곳은 빵과 잠 잘 곳을 위해 돈을 구걸해야 하는 막다른 궁핍함으로 힘들지만 서로의 어려움을 돕고 위로하는 삶 또한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그들이 마딱뜨리고 있는 궁핍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다.     


아이들의 여름날     

  <플로리타 프로젝트>는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는 디즈니랜드에서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값싼 모텔(매직캐슬)에서 장기 거주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홈리스들의 이야기이다. 원래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장소를 만들려는 디즈니사의 프로젝트였다. 더불어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환상적인 색깔로 단장한 궁전같은 모텔을 세웠지만 경기 침체와 고속도로의 건설로 고객의 발걸음이 끊긴 모텔은 2008년 몰아닥친 금융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곤궁에 처한 홈리스들의 장기 거주지가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아빠는 없이 엄마와 함께 사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이다. 빈곤한 삶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힘든 환경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복도에서는 거친 욕설이 들리고 공용 수영장에는 가슴을 드러낸 채 일광욕을 즐기는 나이든 여성이 있는가 하면 엄마라는 사람은 늘상 입에 대마초 담배를 물고  산다. 또한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장난감은 모텔을 떠나는 아이들이 남긴 것이며 셋이서 돌려가며 나눠 먹는 한 개의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디즈니랜드 근처 관광객에게 푼돈을 구걸하는 것 또한 놀이에 가깝다. 심지어 접근이 금지된 모텔 기계실에 들어가 전기 회로를 끊어 큰 혼란을 일으키고 근처 폐허가 된 콘도에 불장난을 하는 것도 아이들에겐 놀이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마냥 즐겁다. 놀이 공원에 입장할 돈이 없는 아이들은 늘 지나다니는 디즈니랜드앞의 알록달록한 한 오렌지 모양이나 모자 쓴 마법사가 커다랗게 장식된 장난감 가게에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씩씩하게 걸어 나간다. 아이들의 장난감은 돈만 주면 금세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친구가 남긴 것이며 놀이터는 근처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늪지나 폐가가 된 콘도, 심지어 모텔 안도 재미난 놀이의 장소가 된다. 어찌보면 열린 넓은 세상에서 아이들은 아름다운 하늘과 나무 사이를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더없이 즐겁다.   

  


  문제는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한 빈곤한 현실 때문에 어른들은 그 아이들을 방치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니(브루클린 프린스)는 새로 사귄 젠시(발레리아 코트)와 더없이 즐거운 여름을 보낸다. 때로 비가 온 뒤, 환하게 뜬 무지개를 보며 무지개 끝에는 황금이 숨어있다는 동화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크고 휘어진 나무 앞에 앉아 무니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 나무를 참 좋아한다’며 제법 철든 모습을 보인다. 궁핍한 삶을 살면서 쓰러지기보다 본능적으로 다시 일어나는 회복의 힘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는 대견스럽고 예쁘다.    

 

엄마와 아이의 빵과 잠자리     


  우리는 때로 빈곤한 사람들의 삶이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곳이건 그 세계에는 그 나름대로의 행복과 웃음 그리고 서로 위로를 나누는 따뜻함이 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선의 위로는 쓰러지지 않는 나무의 강건함이고 최선의 선물은 하늘의 불꽃놀이와 비가 온 뒤 환하게 뜬 무지개이다. 비가 오면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와 무니는 비를 흠뻑 맛으며 신나게 놀고 친구 젠시의 생일날 밤에는 너른 공터에서 작은 빵으로 축하를 하며 디즈니랜드에서 쏘아올리는 불꽃놀이를 올려다 보며 마냥 행복해한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이고 현실은 혹독하다. 무니의 엄마 핼리는 더없이 딸을 사랑하지만 딸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방관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판단하지 못한다. 어쩌면 알지만 그녀가 겪는 극도의 궁핍함이 그녀를 사리분별에 무덤덤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것이 10대에 무니를 낳아 키우는 미혼모인 그녀의 처지를 미루어 보아 핼리 또한 어른이나 사회로부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도는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사랑받은 적이 없는 핼리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저 본능적인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와 놀아줄 뿐이다. 심지어 핼리의 정신 연령은 무니의 나이에 멈추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누가 뭐래도 무니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엄마 핼리이다.     


  그렇다고 핼리가 막무가내 아이와 같은 엄마일 수는 없다. 현실은 어떻게든 딸아이와 잘 공간과 먹을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어른의 역할이 남아있다. 아무리해도 직업을  구할 수 없으니 일주일마다 한번씩 지불해야 하는 모텔 렌트비를 마련하기 위해 핼리가 하는 일은 근처 마켓에서 싸구려 향수를 사서 고급 콘도 손님들에게 팔거나 심지어 놀이 공원의 입장 손목 팔찌를 훔쳐 되팔기도 한다. 그것도 안되면 핼리는 무니를 앞세워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빌미로 약간의 돈을 구걸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의 삶을 산다. 자존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핼리의 궁핍한 돈벌이에 무니는 늘상 함께 한다. 그러니 무니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잔돈을 구걸하는 것에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참한 현실은 고정된 직업이 없이 버티기에는 한계에 다다른 핼리의 삶이다. 결국 핼리는 클럽 댄서를 할 때에도 그토록 경멸했던 성매매를 하기에 이른다. 빵과 방을 구하기 위해 무니를 목욕탕에서 인형놀이를 하게 하고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성매매를 해야하는 핼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결국 모텔 매니저 바비(윌렘 대포)조차 알게 된 핼리의 처지에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동 복지국이 관여해 아이를 다른 가정에 위탁 입양하는 것이다. 아이와 엄마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가슴 아픈 상황에서 해답은 그들이 함께 살아갈 방도의 모색이 아니라 강제적 분리이다. 가장 쉬운 답이다. 모녀간의 애정을 가늠하기보다 분리를 권하는 사회적 시스템은 컴퓨터의 이진법처럼 차갑고 단순하다.  

    

여름이 저물 무렵      


  그들을 곁에서 감싸주고 도와왔던 인물은 모텔의 매니저인 바비이다.  그는 내심 딱한 처지에 있는 핼리를 걱정하지만 핼리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조용히 도움을 주기도 하고 천방지축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이 따뜻한 친구이자 소아성애자같은 위험 인물의 접근에 무방비인 아이들의 든든한 보호자이다. 그렇지만 그는 렌트비를 내기조차 어려운 핼리에게 어떻게든 렌트비를 받아야 하는 임무가 있는 고용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보비의 딜렘마는 황새를 몰아내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모텔 앞 차도에 들어와 있는 황새 가족을 몰아 풀밭으로 내보내는 보비의 행동은 황새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텔에서 황새를 몰아내는 것이다. 개인의 따뜻한 마음은 이웃을 챙기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되기에는 턱없이 무력하다.    

 

  핼리의 매춘이 발각되자 핼리는 강제적으로 양육권을 빼앗길 처지로 내몰린다. 그렇지만 무니를 쉽게 보내지 않으려는 핼리의 발악에 가까운 저항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고 아동 복지국 직원이 몰려오자 사태를 직감한 무니는 가장 친했던 젠시가 사는 모텔 ‘퓨처랜드’로 뛰어가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하던 무니의 말은 그동안 겪었을 모녀의 거친 삶을 짐작하게 한다. 친구에게 이별 인사를 하며 우는 무니의 손을 그때까지 수동적이기만 했던 젠시가 단호하게 잡고 디즈니랜드를 향해 인파 속을 헤치고 달려간다. 

  아이들의 우정이 구원의 씨앗이 되리라는 낭만적 희망은 접어 두더라도 이 상황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잠시 혼돈스럽다. 그렇지만 도망치듯 달려 디즈니랜드 성에 닿는 것은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현실적으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에 이것은 그저 무니의 희망에 불과한 환상이 아니었을까를 짐작해 볼 뿐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 세계 반대편에 있는 환상의 세계에 닿고 싶은 꿈이 왜 아이들에게 없었으랴. 단지 가난 때문에 일찍 철든 아이들이 마음속에 숨긴 꿈. 젠시가 사는 모텔의 이름이 ‘퓨처랜드’인 것은 비록 엄마와 헤어진다해도 쓰러져도 일어나는 나무같이 꿋꿋이 삶을 헤쳐나가리라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마지막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는 사회에서 내몰린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함께 고민해보는 공동체로서의 연대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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