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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Jan 25. 2024

낭만CC, 상식아파트

#6

오래전이었습니다. 처음 갔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페어웨이 잔디가 이렇게 빼곡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밀도가 높았고 티박스에 선 골퍼는 홀 전체를 보며 어떻게 칠 것인지를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자의 철학이 구현된 코스 레이아웃도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두 번째 초대를 받고 골프장으로 향했습니다. 비가 온다고 하더니 강변북로를 달리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폭우가 아니니 골프장으로 향하는 건 당연했지만 도착하고 나니 빗망울이 많이 굵어졌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라운드를 포기했습니다. 


회원인 띠동갑 선배가 다음에 날씨 좋은 날 다시 초대할 테니 오늘은 안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골프장 직원이 다가와 오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안내를 전했습니다. 클럽하우스 식당은 거의 만석이었습니다. 늦여름이었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따듯한 국물이 있는 식사를 주문했습니다.


띠 동갑 선배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양복을 입은 남자가 테이블을 돌며 사람들과 간단한 담소를 나누는 게 보였습니다. 우리 테이블에도 그분이 다가와 회원인 띠동갑 선배와 반갑게 인사를 했고 우리 일행과도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비 때문에 라운드를 못해서 자신도 속상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골프장 대표라고 했습니다. 골퍼로서의 안타까움을 공감하던 그분은 송추 CC를 운영하는 대표였는지 오너였는지는 모릅니다. 운영대표였어도 멋졌고 오너였어도 참 인간적인 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은 어떤 이유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


12월 초. 골프를 시작한 지 1년이 안된 고등학교 동창 친구 세명과 라운드 약속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벌써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부킹 했던 골프장은 휴장 결정을 내렸지만 우리는 휴장 하지 않는 골프장을 찾아 전화를 돌렸습니다. 일단 들어서면 미치지 않고는 배기기 힘든 골프라는 터널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던 친구들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다 쓴 치약을 짜고 짜내듯 사업과 생활을 짜내 만든 시간이라 골프가 더 절실했던 한 친구가 강원도까지 전화를 돌렸고 결국 찾아냈습니다. 


오후에는 눈이 더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던 강원도였지만 우리는 중부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 모여 마침 4륜 구동이었던 한 친구의 차를 타고 강원도로 출발했습니다.


골프장에 도착하니 강원도 다운 함박눈이 반겨 주었습니다. 눈송이가 얼마나 큰지 없는 바람을 타고 하루종일 허공을 부유할 듯 떠오르다 선녀처럼 살포시 땅으로 내려앉았습니다. 클럽하우스에는 스무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선녀의 옷을 훔칠까 말까 망설이는 나무꾼처럼 서성였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나왔는데 아까부터 서 있던 진한 석탄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눈이 쌓여서 공을 잘 찾지 못할 거라며 주홍색 볼 6개와 핫팩이 담긴 투명한 플라스틱 주머리를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저와 직원들 모두 라운드 무사히 마치고 들어 오실 때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시고 아마 이런 눈을 맞으며 골프를 치는 경험은 평생 다시없을지도 모릅니다. 즐거운 추억 쌓으시고 이따 뵙겠습니다." 


이런 눈에 휴장을 안 하는 골프장도 신기했지만 그분에게도 각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얗게 변한 골프장은 한동안 폭설 같은 눈이 내리기도 했고 페어웨이와 그린 모두 점점 더 두터운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곤한 잠에 빠질 것 같았습니다. 그린에서 펏을 하면 테니스 공만 한 눈덩어리가 됐고 발목까지 차오른 눈 때문에 양말도 젖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 말이 맞았습니다. 생전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라운드가 되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골프장에서는 한 번도 다가설 수 없었던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미친 듯이 골프장을 뛰어다녔습니다.


내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잃는 사람과 따는 사람이 생겼지만 내기도 스코어도 재미를 위해 존재할 뿐... 정말 선녀를 얻은 나무꾼이 된 것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라운드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들어서자 그 신사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은 모라라지 않았는지, 대단한 골프 열정이라며 덕담을 건네주셨습니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요?

눈 때문에 공을 찾지 못할까 걱정해 주는 골프장이 있을까요?

걱정은 한다 해도 공까지 건네주는 골프장이 있을까요?

몇 팀 나가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라운드를 마칠 때까지 클럽하우스가 썰렁하지 않게 배려하려는 골프장이 있을까요?

여러모로 그날은 상식을 벗어난 골프였습니다.


...


고등학교 친구 K가 뒤늦게 골프를 시작했습니다. 워낙 성실했고 직장 생활에 열심이었던 친구가 5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연 작은 무역회사를 코로나 때문에 접어야 했고, 마침 입주한 아파트 주민센터에 있는 골프 연습장 덕분이었습니다. 


K와 오랜만에 만나 스크린 골프를 치고 골프 이야기를 이어가다 대화 끝 무렵에 아파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아파트를 안 샀으면 어쩔 뻔했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는 20년간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서 모은 돈으로 4년 전 경기도에 있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때 친구는 아파트 가격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높은 것 같다며 많이 망설였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민 끝에 아파트를 샀고 그 아파트가 불과 4년 남짓만에 가격이 50%나 올랐습니다. 친구는 무척 흡족해했습니다. 물론 집을 팔지 않는 한 손에 쥘 수는 없는 돈이었지만 20년 동안 애써 모은 돈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번 것도 좋았고, 아파트 덕분에 골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기뻐했습니다.


친구는 횡단보도에서 길 건너 아파트를 바라볼 때나, 차를 타고 아파트로 들어설 때 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친구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친구와 헤어진 후 얼마 안 가 알아냈습니다. 친구의 상식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4년 전만 해도 이 정도 위치의 아파트라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던 아파트 가격이 이젠 4년 만에 50%나 더 올랐는데도 비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더 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이 친구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을까요?


송추 CC와 센추리 21 CC에서 뵈었던 두 분으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매출대비 순수익률이 50%를 넘는 골프장이 탄생하는 세상인데...

공생이나 상생은 정글로 뒤덮인 지 오랜데...

두 분이 세상을 바라보던 상식은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궁금해집니다.


글을 쓰고 보니 정말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하는 파파 할아버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바보 같은 희망을 꿈궈 봅니다.

언젠가 우리 골프에 다시 낭만이 숨을 쉴 수 있는 시절이 찾아오기를요!


https://youtu.be/wtmPGv8H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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