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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Feb 07. 2024

괴로워도 슬퍼도~ 캔디?

#16

열여섯 번째 이야기

#16 괴로워도 슬퍼도~ 캔디?


워낙 알레르기가 심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즌에는 집 창문도 잘 열지 않고 가능하면 바깥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골프는 예외입니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이상하게 용기가 나더군요. 아~! 용기가 아니고 만용이 맞겠네요.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초였습니다. 골프장에 갈 때는 1알로 24시간이 지속되는 알레르기약을 6시간마다 한 알씩 먹습니다. 의학적인 판단은 아니고 제 나름대로 살려고 무리수를 두는 거였습니다. 가끔 골프를 안쳐도 너무 괴로워 12시간마다 먹는 건 예사였고 그로 인한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기 때문에 나름 임상을 통한 안전성(?)을 검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운드를 앞두고 너무 심해진 알레르기 때문에 잠수부가 쓰는 커다란 수경과 수영 선수가 쓰는 눈만 가리는 수경을 준비했습니다. 잠수부 수경을 쓰고 골프장에 들어섰습니다. 프런트와 스타터가 웃었지만 알레르기가 워낙 심한 미국이라 골퍼만의 미친 이해심으로 "굿럭"을 외쳐주었습니다.


1번 홀 티샷을 하고 수경에 찬 습기 때문에 잠시 벗어 닦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걸로 끝이었습니다. 

소량이었겠지만 충분한 알러젠이 이미 촉촉해진 눈에 달라붙었습니다. 금세 점도 높은 눈물이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만지면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졸음에 고개가 꺾이듯 어쩔 수 없이 휴지를 접어 살짝 눈가 눈물을 훔쳤습니다. 뇌관을 건드렸습니다. 눈가에 불이 붙으며 화끈한 작열감이 타올랐습니다. 더불어 가려움도 폭발했습니다. 


3번 홀부터는 수경을 쓰나 안 쓰나 차이가 없어졌고 습기로 뿌옇게 변해 어차피 사용이 불가능했던 수경을 벗었습니다. 마스크를 꼈지만 심장이 점점 머리 쪽으로 올라오며 숨도 가빠졌습니다. 흐른 콧물이 입술을 타고 마스크를 적셨습니다. 코도 연신 풀었지만 준비해 온 휴지를 마스크 안으로 갈아 넣고 견뎠습니다.


8번 홀을 지났을 때 심장 소리가 커다란 북소리처럼 쿵쿵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은 이미 머리에서 뛰고 있었는데 이젠 머리 전체가 심장이 된 것처럼 수축하는 것 같았고 그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습니다.


예전 딱 한번 최루탄이 머리 위에서 터지며 연녹색 가루를 뒤집어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거의 비슷했습니다. 눈은 눈물로 젖었는데 타 죽은 세포가 진물로 흐르며 눈가를 녹이는 것 같았습니다. 코는 공기가 들락 거릴 때마다 청양고추로 비강을 비비는 것 같았고 폐는 뜨거운 후추물로 차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퍼팅을 하려 어드레스를 하면 맑은 콧물이 공 위로 후드득 소나기처럼 떨어지더군요.


얼마 안 가 어지러움이 심해졌고 감각은 물론 운동신경의 제어도 불가능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대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골프장을 탈출했습니다. 12번 홀까지 골프장에서 골퍼로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어리석음이었습니다.  


https://youtu.be/6QXe_Y978GU


반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한 여름이었겠죠? 집 근처 골프장, 호세(Jose)가 구워주는 수제 햄버거를 빼곤 골프장 음식은 맛도 없고 괜히 비싼 느낌도 들어서 웬만하면 잘 먹지 않았습니다. 또 보통 핫도그를 먹는데 그날따라 왜 햄버거를 시켰는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전반을 돌고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웰돈(well-done)으로 주문을 했는데 반쯤 먹다 보니 핑크빛이 너무 많아 보이더군요. 그냥 먹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1번 홀 티샷을 하고 났는데 배가 부글거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상했지만 설마 했습니다. 하지만 12번 홀 그린에 올라가는데 싸늘해진 뱃속은 장마철 계곡처럼 거칠어지기 시작하더군요. 가뜩이나 과민성인데 아까 먹은 햄버거가 문제를 일으킨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일단 급하게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혀로 침샘을 자극해서 입에 고인 침을 모아 뱉는 저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워낙 침이 많은 터라 입에 가득 침을 모아 두세 번을 뱉었습니다. 경험상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이 방법으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살짝 불안했던 변의가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미국 퍼블릭 골프장 대부분 클럽하우스 말고는 그늘집이나 화장실은 적거나 없는데 그 골프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클럽 하우스에서 제일 먼 곳까지 온 상태였습니다. 뒷팀 플레이와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려면 시간도 더 걸릴 게 뻔했습니다. 더구나 클럽하우스 까지는 계속 오르막. 풀카트를 끌며 걷던 골프라 클럽하우스까지 무사히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클럽하우스를 향해 뒤로 돌아서고 나면 어떤 다른 선택도 불가능한 외통수 길이었습니다.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급똥은 반바지라 바지에 담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최선은 15번 홀이었습니다. 홀사이에 숲이나 나무가 없는 사방이 뻥 뚫린 골프장이었지만 골프장의 외곽과 맞닿아 있는 15번 홀 바깥에는 개울보다는 훨씬 크고 강이 되기엔 너무 협소한 개천이 흘렀습니다. 개천과 골프장 사이에는 5미터 정도 깊이의 숲도 있었고요. 골프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모든 목표는 어떻게든 15번 홀까지만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여름이라 더웠는데 식은땀이 났습니다. 점점 몸이 배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느낌과 만약 터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려 했지만 하얗게 변한 머릿속은 점점 더 하얘지기만 하더군요. 


이젠 끝이었습니다. 

동반자에게 내 카트를 끌고 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골프백에 걸려있는 공 닦는 수건을 빼서 손에 쥐었습니다. 뛰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을 테니 걸었겠지요. 하지만 전속력으로 걸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14번 홀 티박스와 15번 홀 페어웨이를 가로질러 개천가로 숨어들었습니다. 


10초만 늦었어도 불가능했던 상황을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던 머리가 핑핑 돌며 공원국에 걸렸으면 이유가 뭐였 건 벌금티켓을 받았을 거란 생각, 동반자들은 어디쯤 있을까라는 생각, 지금 밖에 나가서 그냥 기다려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물론 찝찝한 엉덩이로 나머지 홀을 마치는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고 해야 하는지 뭔지...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 제 골프백에는 지사제와 여행용 티슈가 상비용품으로 추가되었습니다. 물론 공 닦는 수건도 하나 새로 장만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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