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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Feb 08. 2024

우리! 죽는 날까지 함께 가는 거야~!!!

#17

열일곱 번째 이야기

우리! 죽는 날까지 함께 가는 거야~!!!


지인의 지인으로 알게 된 K는 인물도 훤칠했고 세련된 매너와 신중한 말투를 가진 패셔니스트였습니다. 골프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습니다.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을 호가하는 한정판 스카티 케메룬 캐디백을 주로 사용했고 집에는 희귀한 수제 클럽들을 소장한 작은 박물관 같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잠깐 K와 고정 썸(some)으로 골프를 쳤습니다. 라운드가 쌓여가며 K의 별명이 생겼습니다. 물론 K가 없을 때만 사용하는 애칭이었습니다. '언제나 220' 혹은 '전진 30'이었습니다.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으로 넣어주는 방법,  즉, 손이 움직이는 구간별 벡터, 속도, 이동거리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수저를 잡는 법은 혹시 배웠는지 몰라도 움직임을 배우지는 않았으니까요. 

골프도 그렇습니다. 설사 같은 스윙이론을 배웠다 해도 사람마다 구현하는 방법은 정말 다르니까요. 


K는 임팩이 좋은 골퍼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임팩을 위해 하는 게 스윙이라는 신념을 가진 골퍼였습니다. 아이언 샷이 좋았고 다만 드라이버는 상대적으로 고민이 좀 있는 골퍼였죠. 임팩존의 직선거리가 조금 짧다 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드라이버 샷이 많이 죽었습니다. 


물론 한 번도 죽지 않는 날도 있지만 그날은 K의 드라이버가 유별나게 많이 죽는 날이었습니다. K가 8번 홀 티샷을 날렸습니다. 100미터는 똑바로 날아가던 공이 왼쪽 숲 속에서 뭘 봤는지 거의 90도로 꺾이며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벌써 3번째 티샷 미스였습니다. 그나마 빨간 말뚝이라 다행이었습니다. 


부리나케 카트를 몰고 간 K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해저드말뚝 근처 잡풀숲을 헤집기 시작했습니다.


K의 공은 170미터 근처에서 해저드 지역으로 들어갔지만 K는 220 선상에서 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찾지 못한 K가 4-5미터 뒤쪽을 슬쩍 살핀 후 앞으로 달려가더니 230미터 정도 되는 지점 부근을 살폈습니다. 참고로 K의 드라이버거리는 잘 맞으면 220미터 정도였습니다.


결국 공을 못 찾은 K가 괴팍하고 무섭게 만들어진 일본 전국시대 무사들이 쓰는 투구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230미터 지점에서 드롭을 하고 세 번째 샷을 쳤습니다. 잘 맞은 공은 그린에 안착했고, 파챈스를 맞이했습니다. 아깝게 펏이 빗나가며 보기. K가 아쉬운 탄성을 읊조렸습니다.


K는 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미식가였습니다. 매번은 아니었지만 베풀 땐 좋은 술과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웬만한 이야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듣는 편이었고 가끔 자신과 다른 의견이 나와도 또렷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골프 썸(some)은 같은 자리에 있지만 사계절을 따라 모양과 색을 달리하는 나무처럼,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위치에 와 있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몇십 년을 처음 모였던 썸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날  Y가 먼저 썸을 떠났습니다. 그 자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졌고 얼마 후 또 한 명이 떠나며 썸은 깨졌습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평소 인품과는 달리 드라이버가 죽으면 공이 들어간 곳보다 훨씬 더 앞에서 찾고 못 찾으면 또 조금 더 앞쪽으로 가서 드롭을 하는 것과의 괴리감이 역할을 한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그냥 핑계를 찾다 보니 가장 적당한 이유가 돼버린 것이었을까요?

https://youtu.be/nC3up4v6YnU

P는 얌전한 외모였지만 골프를 치며 보스 기질이 강한 남자라는 걸 알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썸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P가 새로 산 드라이버를 가져와 기존 드라이버와 번갈아 가며 티샷을 날렸습니다. 전반이 끝나자 P는 새로 산 드라이버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고 H가 자기도 한번 쳐보겠다고 했습니다. 

H는 P의 드라이버로 시원한 드라이버 샷을 날렸고 후반 몇 홀에서 평소보다 거리와 방향이 월등한 샷을 뽐냈습니다. 

그런데 15번 홀에서 H가 또 시원한 드라이버 샷을 날리자 P가 말했습니다.

"잘 맞네. 주인은 따로 있었나 보다. 이 드라이버 H가 써라."

가끔 새로 산 드라이버가 잘 안 맞으면 친구나 지인에게 싼 값에 넘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거라고 이해했습니다. 드라이버가 마음에 든 H가 물었습니다.

"얼마에 주실래요?"

P가 답했습니다.

"얼마는 무슨~ 그냥 써. 난 어차피 필요도 없는 건데 뭐~!"


백만 원도 훨씬 넘는 채였는데... 

비닐을 방금 벗긴 채였는데... 

이미 P가 어떤 스타일이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모두 놀랐습니다. 


P는 내기 골프를 좋아했습니다. 아니, P는 언제나 내기 골프를 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대부분의 골퍼는 어떻게든 핸디를 하나라도 높이려고 노력을 했는데 P는 달랐습니다. 전형적인 <잘해야 보기플레이어>였지만 80대 초중반이라고 우겼습니다. 몇 번 라운드를 한 후 동반자 모두 미안한 마음에 핸디가 조금 낮은 것 같으니 올리자고 했지만 껄껄 웃으며 요즘 잘 안 맞아서 그러니 걱정 말라는 말로 거부했습니다. 


사정이 그러니 P는 언제나 넉넉히 잃었습니다. 가끔 잘 맞는 날 P가 잃는 돈이 저녁과 술값으로 모자라면 나머지는 모두 P가 부담했습니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잃어 주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목표를 높게 잡고 그 목표를 이루려는 의지의 결과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멤버 중 한 명이 썸을 떠났습니다. P 때문인 것 같았지만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한 명이 또 떠났습니다. 이번엔 분명히 P 때문이었습니다. 


P는 보스처럼 넉넉하게 베풀었지만 자신의 생각이 정해진 부분에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P와의 라운드는 P의 라운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소한 룰의 적용부터 오케이를 주는 타이밍까지 모든 걸 P가 주도했고 P의 의견을 거부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밥도 사고 술도 사고 선물도 통 크게 주는 P라 쉽게 넘어갔지만 시간이 흐르며 달라졌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P가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K의 소식은 모르지만 여전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그 사람의 철학이 바뀌기 어려운 것처럼 골프도 비슷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네요. 만약 P와 K가 골프를 치지 않았고 골프장이 아닌 곳에서 만났다면 P와 K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겨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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