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여름의 푸르름이 해가져도 여전한 야간 골프가 끝나고 있었습니다. 잠시 앞팀 티샷을 기다렸지만 어느새 18번 홀 티잉 에어리어는 우리 차지가 되었습니다.
밤이 되자 동물들이 오히려 바빠진 것 같았습니다. 벌레 소리도 들리고 티잉 그라운드 건너편 엄마와 아기사슴 2마리가 늦은 야참으로 풀을 뜯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어둠의 입자들이 LED 불빛으로 뽀얗게 변하며 더 차분해진 마지막 홀은 조용한 성당이나 고즈넉한 사찰에 들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많이 친해진 그러나 골퍼로만 친해진 두 사람과 마지막 홀 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치자는 이야기를 했고 그러자고 해서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날은 번호를 받고 통화버튼을 누르기도 하는데 그날은 왠지 그냥 저장만 했습니다.
...
날씨 운이 없을 때가 있는데 2주 전부터 그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부킹 한 날만되면 비가 왔는지, 3번 연속 공을 치지 못했습니다. 스크린으로는 달래 지지 않는 골프장에 가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골퍼의 딜레마, 이해되시죠? 급하게 골프를 치기에는 조인골프 만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라운드 전날 잡고 나간 조인골프 라운드였습니다.
조인된 사람들은 30대로 보이는 커플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라운드를 시작했습니다. 단단한 체구의 남자. 첫 티샷. 오... 장타자입니다. 캐리로 230미터를 쉽게 넘기는 드라이버. 스윙에서도 젊음이 느껴졌습니다. 나도 예전엔 저랬었지라는 회상도 했지만 힘이 잘 모아지는 스윙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키가 170은 돼 보이는 여자도 역시 장타였습니다. 똑같은 거리를 날아가도 훨씬 더 길게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였습니다. 스윙의 시작과 끝이 확실하면 절도 있는 느낌이 드는데 그 여자분이 그랬습니다.
기다려야 할 때마다 짧은 대화를 했습니다. 대개는 간단한 너무 개인적이지 않은 질문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질문보다는 침묵을 원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평소 아내와만 이야기를 하는 건 같은 카트를 타고 4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는 동반자분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일부러라도 공통적인 화제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편입니다. 두 분도 동반자가 누구 건 담소와 웃음, 미소가 있는 골프를 치는 분들 같았습니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골프가 되었고 물론 저는 주로 남자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골프장에서는 대개 더 젊어 보이는데 그 남자분도 그랬었나 봅니다. 30대인 줄 알았는데 40대 초중반이었습니다. 여자분은 30대 중반. 다행히 여자분의 나이는 얼추 맞추었더군요.
어쨌거나 남자분은 골프를 친지 오래되지 않았고 열심히 치지만 골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더군요. 솔직한 표정이라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라운드를 하며 혹시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몇 가지 골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골프에 대한 상식은 물론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한 골퍼는 절대 알 수 없는 디테일과 전문적인 지식도 상당했습니다.
골프를 친지 얼마되지 않은 게 맞냐고 몇 번을 물었는데 진짜 그렇다고 그러더군요. 자신의 핸디를 겸손하게 말하는 골퍼는 많이 보았지만 골프에 대한 지식을 숨기는 경우가 처음이라 긴가민가 했습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저의 순진함이 민망합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호칭과 대화를 통해 부부가 아니라는 건 알았습니다. 골프로 만났고 순수하게 골프만 즐기는 골프버디라고 이야기했는데 주책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후반 들어 나름 친해졌다는 착각으로 둘이 사귀면 좋겠다는 말을 뱉은 거죠. 라운드를 하며 보이는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응원을 한답시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이 재미있지만 참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남자가 그냥 웃어넘겼고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라도 알 수 있었어야 했는데...
사귀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사실 전반 중반에 남자가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새벽에 만나 18홀을 돌고 난 후 점심을 먹고 골프를 더 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즉석에서 야간 라운드를 잡고 야간 라운드를 위해 4시간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름 골프에서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자부하고 하루동안 두 개의 다른 골프장에서 두 번의 라운드를 연달아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중간에 4시간 이상을 기다리고 나서 36홀을 쳤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정도 열의가 있고 그 정도로 호흡이 잘 맞고 또 그럴 정도로 어딘가 묶인 게 없다면 안 사귄다는 게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설사 좋은 뜻이었다 해도 사귀면 어떠냐는 이야기는 도를 넘은 말이었습니다. 겨우 골프 라운드 한번 그것도 동반자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카트를 탄 건데... 참견도 보통 참견이 아니었으니까요.
다음날 왠지 미안한 마음에 인사와 덕담을 보내려고 전화번호로 카톡 친추를 했습니다. 그런데 친추가 안되더군요.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왔습니다.
한동안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네 맞습니다. 번호를 다른 번호를 불러 주었고 아마 한자리가 다른 번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그때 전화번호를 받고 통화버튼을 눌렀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을까요? 상상만으로도 어색하고 아찔합니다. 아니면 그분은 뭔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요? 어쨌거나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전화번호를 받고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은 건 그날 제일 잘한 결정과 행동인 것 같으니까요.
다행인 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두 분의 라운드는 저로 인해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분의 멘털이 강해서인지 동반자에 대한 남다른 기준을 가져서인지, 두 분 모두 끝까지 시종일관 좋은 샷과 게임을 이어갔습니다. 두 분 만의 화기애애하고 신뢰가 그득한 모습도 그대로였고요.
그래도 한 가지는 아쉽습니다. 겸손이었는지 프라이버시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18홀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지... 조금만 빈틈을 보여주었어도 저의 주책은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암튼 덕분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나 마음이라도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은 부담이고 불편함이란 걸 또 한 번 잘 배웠습니다. 전할 방법은 없지만 그날 실례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