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번 홀부터 흘깃흘깃 시선을 홀리던 석양이 도톰하게 솟은 낮은 산봉우리 사이를 오렌지색 빛알갱이로 순식간에 채워버렸습니다. 17번 홀, 전망 좋은 티박스에서 바라보는 불구름(火雲)은 푸른 어둠 속이라 그런지 더 밝아 보였습니다. 플로리다 골프여행 중에 마주했던 겨울 석양보다 훨씬 더 진하네요. 실루엣만 남은 산과의 대비 때문일까요?
(G의 마음속 혼잣말)
R은 오늘도 첫 티샷이 참 좋네. 신기해. 왜 첫 티샷은 좋은 샷이 많고 최소한 나쁘지는 않을까?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스윙에 대해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었거나 아니면 무념무상이라 그랬을 거야. 그런데 3번 홀부터 헤드를 손으로 잡아 돌리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사이드에서 헤드가 떨어지질 않네. 탑에서 바로 공을 때리러 가니 안 맞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구력 5년 차라고 볼 컨택은 나오는 걸 보면 참 대단해. 어휴... 근데 그럼 뭐 해... 헤드도, 거리도 자기만 아는 만족감도 모두 무거워진 걸...
오늘도 잘 참다가 왜 참지 못하고 조언을 했는지... 되로 준 참견이 분노와 원망이 그득한 가마니가 돼서 날아왔지 뭐야. 그나마 어찌어찌 잘 피해서 다행이었지만 조심해야지. 이러다 정말 언젠간 깔려서 오징어가 될지도 몰라.
이제 2홀 남았는데 지난번처럼 또 마지막 두 홀은 헤드가 떨어지고 오잘공이 나오려나? 아니 나왔으면 좋겠다. 꼭. 근데 왜 라운드 중간에는 헤맬까? 욕심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 아우님 S도 참 대단해. 아무나 드라이버가 앞으로 만 가면 별로 잘 맞지도 않았는데 잘 맞았다고 물개 박수를 치며 굿샷을 외친단 말이야. 골프를 치면 마음의 온도가 느껴지는데 감동 잘하고 툭하면 비브라토 기법으로 과장되게 성대를 울리는 걸 보면 아우도 따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런 건 나랑 많이 비슷한데, 나랑 비슷하다고 하면 아우가 싫어하려나? ㅎㅎ
그러고 보면 제수씨, J와는 라운드를 하며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네... 나는 R을 아우님은 J를 챙기고, 여자티와 카트에서는 R과 J의 대화가 쫀득하니 틈이 없어. 그런데 다행이야. 괜히 J의 스윙에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의 굴뚝에 잘못 불을 피웠다간 매캐한 연기로 기침과 눈물만 날 테니... 참아야지. 참자~ 참어~. 허벅지 꾹꾹!
(S의 마음속 혼잣말)
G형님은 오늘도 R님 전담 캐디를 자처하며 티각태각 알콩달콩 즐거운 라운드를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다. 나도 질 수는 없다. 골프는 져도 괜찮지만 사랑은 질 수 없지~! 그나저나 우리 J~! 드라이버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다. 새로 샀을 때만 해도 라운드마다 늘어난 드라이버 거리로 희희낙락했었는데 지난 3번의 라운드에서는 오히려 예전 드라이버 보다 못한 것 같다. 결국 드라이버가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확신한 J의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ㅜㅜ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J를 보면 왜 이제야 드라이버를 바꿨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 차라리 핑곗거리로 남겨둘걸...
그래도 오늘은 J의 티샷이 좋아졌다. 물론 만족할 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내는 J가 대견하다. 이제 한 홀만 더 치면 마지막 홀이다. 형님과 처음 라운드를 할 때 마지막 홀에서 칩인 버디를 했었는데, 오늘도 첫 홀을 오비로 시작했지만 후반 들며 좋아진 샷을 스코어도 잘 따라오고 있다. 가끔 형님이 괜찮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고수일수록 후반을 더 잘 친다.'는 말이다. 역시 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보다. 최근 내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까. 난 이젠 18번 홀에서 제일 강하고 17번도 강한 골퍼다. 나는 해 질 녘 바위에 꼽힌 칼을 뽑는 아더왕이다. 재미있고 보람 있는 골프. 가끔 형님과의 골프가 그래서 나쁘지 않다. ㅋ
(R의 마음속 혼잣말)
두 남자는 티박스에서, 우리는 카트에 앉아 이야기를 한다. 우리야 그렇다지만 저 두 사람은 뭔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수다는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 G가 다 좋은데, 마음도 아는데 그래도 라운드 중에는 최소한 스윙하기 전에는 코칭을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스윙 직전에 들어야 바로 적용할 수 있어 그런다는 건 알지만 그건 나를 너무 과대 평가한 거다. 그런데 G는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 한대로 할 수 있으면 내가 프로지. '이누마~ 제발 나 좀 놔둬라~ 이누마!'
이야길 듣고 집중해서 해보는 것뿐이지 결코 그런 시도가 제대로 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G의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그런 도전을 통해 스윙을 만들어 가는 거란 G의 말이 한편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번 연습라운드도 아니고. 나도 좀 제대로 치고 점수도 좀 내려가는 꼴을 좀 보고 싶다. 나보다 구력도 적고 라운드 횟수는 더 적은 J가 드라이버를 뻥뻥 내 지를 때 드는 자책감. 부러움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다. 그냥 나는 오히려 초보때보다 드라이버가 거리가 대폭 줄었는데 '이건 뭔가 싶은 이 마음' G는 알려나...
아까 15번 홀에서 딱 한번 드라이버가 잘 맞았더니 초보 때는 180미터를 때렸다는 G의 말이 살짝 밉다. 잘 맞아야 간신히 반올림해서 겨우 150미터로 판정받는 판에 그런 이야기는 거짓말이거나 허풍이 될 뿐인데... 근데 정말 나는 그때 어떻게 그렇게 멀리 쳤을까? 죽기 전에 꼭 그렇게 다시 또 쳐보고 싶다. 그나저나 J는 좋겠다.
(J의 마음속 혼잣말)
골프는 좋다. 거의 좋다. 다만 좀 쉬웠으면 좋겠다. 오늘도 드라이버 때문에 마음이 꽉 막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웃었다. 넓은 잔디밭이라 그런지 마음껏 웃는 것 같다. 그런데 참... 골프가 뭘까? 이렇게 안될 수 있는 게 있나? 그러고 보면 사람에게는 치인 적이 있었지만 삶은 그래도 노력하면 결과가 나오는 길이었는데. 이건 마음까지 쏟아부었는데도 좀 된다 싶으면 갑자기 뒷걸음질을 치고... 그래도 R언니를 만난 것도 골프 덕분이니 용서해 줄까? 용서? 그래 용서. 누굴? 누군 누구야 너, 너 말이야. 골프.
G님이야 장난치듯 공을 치고 R언니는 잘 맞지도 않았는데 엄청 잘 맞았다 그러고. 난 사실 더 잘 칠 수 있는데 말이야. ㅎㅎ 두 사람을 보면 골프는 나이 들어 함께 할 수 있는 정말 훌륭한 취미 같아. 우리도 두 사람처럼 보일까? 그러려면 우리 S가 조금 더 잘 쳐야 하는데 ㅋㅋ
꽤 강해 보일 수도 있고 키도 크고 머리도 큰 S는 거의 모든 걸 즐겁게 하지만 골프는 유독 더 즐거워하는 것 같다. 어쩜 나는 그래서 골프를 조금 더 좋아하는 걸까? 나도 내 위주로 좀 더 살아야 하는데 엄마 마음은 이제 그만 멈춰야지. 벌써 오늘도 17번 홀. 숨도 더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도 다지고 잘해봐야지. 잘 치고 싶다. 이제 기회는 두 번만 남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