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예고 없이 꺼지기도 하니까
전 세계 어디서든
결제 화면에 스마트폰만 대면 끝나는 시대.
삼성페이도, 애플페이도 그 편리함으로 인기를 끌지만
그들도 르완다에서는 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글로벌 결제 시스템을 단숨에 눌러버리는
로컬 최강자가 있으니, 이름하여 모모(MoMo).
모모는 르완다의 모바일 머니 서비스다.
MTN 같은 현지 통신사의 유심만 꽂으면
휴대폰 번호 하나로 모든 결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지갑? 없어도 된다.
앱? 그런 건 이곳에서 사치다.
돈을 쓰고 싶은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휴대폰 키패드에 *182#을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그럼 몇 초 뒤 아래와 같은 메뉴 창이 뜬다.
1번은 송금, 2번은 전기나 데이터, 통신 요금제 충전.
이외에도 계좌 조회, 출금, 비밀번호 변경, 정부 서비스 이용까지. 상상하는 대부분의 금융 활동이 여기서 다 가능하다.
모모 사용에 익숙해지면 이제 이런 긴 번호도
주저 없이 입력할 수 있게 된다.
*182*8*1*051144*1600#
처음 보면 낯설고 복잡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182# → 모모의 시작 신호.
8 → ‘송금하기’를 선택
1 → ‘다른 사용자에게 보내기’
051144 → 상대방의 전화번호
1600 → 보낼 금액 (르완다 프랑 단위)
# → 명령어의 끝을 알리는 마침표 같은 것. 꼭 붙여야 한다.
즉, *182*8*1*051144*1600#는
“051144번에게 1600프랑을 송금하겠다”는 문장인 셈이다.
(참고로 이 화면은 800원짜리 망고를 두 개 구매하며 입력했던 화면이다.)
결제를 마치면 곧바로 문자가 도착한다.
지출 내역이 자동으로 남으니
밀린 가계부 정리도 한결 수월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과정이 스마트폰 없이도 가능하다는 사실.
터치도, 앱도 필요 없다.
숫자 키패드만 사용할 수 있다면
18,000원짜리 피처폰에서도 실행 가능하다.
보통 슈퍼와 식당에는 모모 코드 안내판이 붙어 있다.
6자리 숫자로 된 가게 전용 번호다.
개인끼리 번호로 송금하면 금액에 따라
최소 100프랑 정도의 수수료가 붙지만
가게 전용 코드로 결제하면 수수료가 없다.
간혹 전용 코드가 없다며
번호로 송금하라는 가게들도 있는데
그럼 굉장히 짱난다!
모모는 르완다의 국민 결제 시스템이다.
보급률이 워낙 높아 허름한 구멍가게조차
모모가 안 되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바구니 하나 들고 다니는 노점상도 피처폰으로 모모를 쓰니
현금을 쓸 일이 정말 없다.
*
찾아보니 모모는 ’USSD(유에스에스디)’라는 오래된 기술로 작동한다.
USSD는 1990년대 초반,
스마트폰은 물론 앱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휴대폰에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개발된
가장 원초적인 모바일 통신 방식이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며 점점 잊혔지만
이 기술은 2007년 무렵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인터넷 없이도 작동하고, 피처폰 하나로도 충분하니
이보다 더 완벽한 결제 방식은 이곳에 없었을 거다.
케냐의 M-Pesa, 탄자니아의 Tigo Pesa,
그리고 이곳 르완다의 MoMo까지.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이 USSD 기반의
자국형 모바일 머니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시장에서 바나나를 사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물을 살 때도,
시외버스표를 끊을 때도 이 작은 키패드 하나면 충분하다.
처음 모모를 경험한 날, 나는 그 단순함에 감탄했다.
이토록 화려한 첨단 기술로 가득한 세상에
결국 가장 단순한 기술이 가장 편리한 혁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치 구식 다이얼 전화기로 미래를 여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르완다에서는 전기도 모모로 산다.
르완다의 전기는 선불이다.
쓰고 나서 내는 게 아니라
쓸 만큼 미리 사두는 방식.
전기가 떨어지면
집집마다 붙어 있는 계량계가 삑삑 소리를 낸다.
돈 달라는 신호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단순하다.
집 고유의 meter number를 입력하고
모모로 원하는 금액만큼 결제하면
곧 숫자 토큰이 도착한다.
토큰을 계량계에 입력하면
삑삑거리던 계량계는 조용해지고
다시 불이 켜진다.
한국에선 전기세가 얼마 나왔다는 말을 흘려들었다.
엄마가 “이번 달엔 좀 많이 나왔네” 하시면
나는 ‘많이’라는 단어만 기억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그 ‘많이’가 얼마쯤 되는지 가늠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기란 늘 켜져 있는 것이었고
꺼진다는 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벽에 손만 뻗으면 불이 들어왔고,
전자레인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돌아갔다.
나는 그 모든 걸 아무 생각 없이 써왔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전기를 ‘산다’는 개념은 생각보다 생생하다.
계량기가 삑삑 울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 얼마만큼의 전기를 샀는지 떠올리고,
지난달보다 소진 속도가 빨랐는지를 되짚는다.
그리고 빨래를 많이 돌렸던가, 조리를 자주 했던가,
사소한 일들을 하나씩 복기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몇 천 프랑을 입력하고
긴 숫자 토큰을 받아 계량기에 눌러 넣는다.
조금 번거롭지만 이 번거로움 덕분에
무심코 돌리던 전자레인지에도
‘전기가 있어서 지금 돌아가고 있음’이라는 인식이 깃든다.
다행히 정전을 빼면 아직 전기가 끊긴 적은 없다.
제때 사두는 덕에 세탁기는 돌아가고,
옷은 냄새나지 않고, 냉장고는 잘 버텨준다.
나는 잘 먹고 살도 포동포동 찌고 있다.
이렇게도 사람은 조금씩 자라는구나 싶다.
밥 달라고 울어대는 계량계 앞에 서는 일조차
어쩐지 나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