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을 조심하는 마음으로
르완다의 우기는 보통 3월부터 5월,
그리고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2월 말부터 6월 말까지의 시간은
우기의 시작부터 끝, 그리고 건기의 문턱까지 이어진다.
말하자면 우기는 내 르완다 생활의 중심부를 차지한 셈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곳의 비는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길어야 서너 시간 남짓.
그래도 우기임을 잊지 말라는 듯
하루에 한 번은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정직하게 출석 도장을 찍는 것이 가끔은 웃기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비가 언제 쏟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침일지, 오후일지, 혹은 피크닉의 한가운데일지
그건 오직 하늘만 안다.
나 같은 이방인은 아직 하늘을 보는 법이 서툴다.
가끔 높은 언덕에서 먼발치로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물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눈으로 좇아본다.
가끔은 예감이 들어맞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빗나갈 뿐이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은 신기하리 만큼 잘 맞춘다.
"오늘은 비가 안 올 것 같아."
함께 일하는 동료의 무심한 한마디가 정확하다.
하늘을 오래 본 사람에게만 생기는 어떤 단련된 감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비는 주저함이 없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쏟아낼 수 있을 만큼 쏟아내고 나서야 멈춘다.
우박처럼 후두둑 내리 꽂히는 빗줄기에
우산은 금세 무용지물이 된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지가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을 때면,
우산을 들고 있는 이 행위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차라리 그냥 비를 맞는 게 낭만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한 번은 출근길에 그런 비를 만난 적이 있다.
우산이 몇 번이나 뒤집혀
결국 우리는 근처 약국 처마 아래로 몸을 피했다.
약사는 익숙한 듯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잠시 뒤 조용히 다가온 젊은 여성과 한 아저씨가
말없이 우리 옆에 나란히 섰다.
처마 아래, 다섯 개의 어깨가 나란히 젖어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도 이곳의 사람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잠시 멈춰간다.
모토꾼이라 불리는 오토바이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리 밑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비를 피해 옹기종기 선 그 모습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기꺼이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이곳만의 여유를 보여준다.
비가 오더라도 르완다의 거리는 배수 걱정이 없다.
바닥엔 깊은 틈들이 나 있고,
도로 양 사이드에는 배수로가 설계되어 있어
물이 빠르게 흘러내린다.
하지만 어떤 틈은 너무 커서, 저녁 무렵 어스름이 깔릴 때면
사람 발목쯤은 가볍게 집어삼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곳에선 앞이나 옆만큼 발밑도 살피며 걸어야 한다.
비가 오는 날 양철 지붕 아래서는
말소리조차 빗소리에 묻혀버린다.
나는 빌라 가장 꼭대기인 4층에 사는데
비가 내릴 때면 양철 지붕을 무자비하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처음엔 무언가 잘못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지금은 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걸.
비가 그친 뒤 공기는 놀랄 만큼 맑다.
평소엔 자동차 매연으로 잿빛이던 도시의 공기가 잠시지만 깨끗해진다.
먼지가 걷히고, 바람이 살랑일 때면 ‘그래, 우기라서 이런 공기도 맡아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 맑음도 잠깐이다.
구름이 걷히고 나면 태양은 작정한 듯 이글이글 내리쬔다.
거리는 금세 뜨거워지고, 걷는 사람의 어깨엔 빗방울이 아닌 땀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
우기에는 망고가 맛이 없다.
하루 끝, 유난히 맛없는 망고를 입에 넣는 순간,
나는 우기 끝에 다가오는 건기가 괜히 더 반가워진다.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맛있는 마음으로 이 풍경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