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라에서 응원하고 타코 먹기
2025년 3월 25일 화요일,
르완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
르완다의 2026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 경기가 열렸다.
장소는 키갈리의 아마호로 스타디움(Amahoro Stadium).
'아마호로'는 르완다어로 '평화'를 뜻한다.
1986년 완공된 이 경기장은 45,508석 규모로
르완다에서 가장 크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약 3분의 2쯤 되는 크기.
생각보다 훨씬 크고 생각보다 훨씬 근사했다.
이날 르완다의 상대는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작은 나라,
레소토였다.
레소토, 이름조차 낯설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국토 면적은 한국의 30% 정도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다.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는 레소토를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라고 말했단다.
우리는 그 말의 반증 사례가 되기로 하자.
축구를 보러 간다고 하니
함께 일하는 르완다 동료가 말했다.
"오늘 경기는 그냥 이긴 거나 다름없지."
찾아보니 실제로 그랬다.
이번 예선은 무승부만으로도
르완다가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르완다 홈경기.
기세도 흐름도, 모두 르완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스타디움 주변은 잔칫날처럼 들떠 있었다.
알고 보니 오늘 경기는 정부가 티켓을 일괄 구매해
무료로 개방한 경기였다.
경기장행 버스도 무료였다.
그만큼 많은 마음들이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기장에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거세졌고
소음도 점점 커졌다.
그런데도 놀라웠던 건 그 와중에도 질서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수천 명이 줄을 서는데 누구 하나 먼저 가겠다고
어깨를 밀거나, 새치기를 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입에 올려본 적 없는 ‘국민성’이라는 말이
그 순간만큼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입장 전에는 신체검사가 있었다.
르완다에서는 쇼핑센터나 공공건물에 들어설 때도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이곳에선 익숙한 절차지만
스타디움의 검사는 그보다 더 철저했다.
가방 안의 작은 파우치까지 열어보고,
가드들은 몸을 훑었다.
늘 눈에 들어오는 건
여성과 남성 가드가 각각 따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줄은 자연스럽게 성별로 나뉘고
신체검사는 동성 가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작지만 확실한 배려가 당연한 방식처럼 자리 잡고 있다.
경기장 내부도 깔끔했다.
예상대로 인공조명은 없었지만
벽면 곳곳의 패턴 유리창 덕분에
공간은 충분히 밝았다.
유리창의 무늬를 따라 햇빛이 안으로 퍼져
자연광만으로도 내부가 고르게 채워졌다.
전기를 아끼는 건축 방식은
기능과 아름다움 사이의 균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각 층마다 스낵 코너가 있었고
좌석 구역마다 가드들이 있어
인파가 몰리지 않도록 조율했다.
르완다 국기를 들고 응원하러 온 외국인들이
기특하게 보였을까, 가드 중 한 명이 우리 일행을 보더니
가장 앞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무료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만큼
시야가 탁 트인 좌석이었다.
사실 경기장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부딪히며 겨우 앉는 작은 의자들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경기장은
잠실이나 고척돔 못지않은 쾌적함을 자랑했다.
공간도, 분위기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정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르완다에 온 지 어느덧 한 달.
이 나라를 바라보며 내가 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정돈됨’이다.
이곳의 대통령 폴 카가메는
2000년부터 25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사이 '르완다판 새마을운동'이라 불리는 정책들이 이어졌고, 도시의 겉모습은 부지런히 다듬어져 왔다고 한다.
외형의 단정함, 표면의 정리된 얼굴.
어쩌면 그게 지금 이 나라가 세상 앞에 내보이고 싶은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축구를 모르는 내가 보아도 경기는 르완다가 주도했다.
공 점유율도 분위기도 르완다가 압도적이었다.
르완다가 이미 한 골을 넣은 상태에서
관중석의 기대는 오직 하나였다.
르완다의 쇄기골.
그런데 후반 막판,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레소토가 기습적인 동점골을 넣은 것이다.
그 순간, 수만 명이 가득 찬 스타디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딴짓을 하고 있었다면
그 골이 들어간 줄도 몰랐을 정도의 정적이었다.
저들끼리만 기뻐하고 있는 레소토 선수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들이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결국 1:1의 무승부로 경기는 막을 내렸다.
무승부였기에 르완다는 다음 라운드 진출에 성공했지만
경기장 어딘가엔 끝내 해소되지 못한 아쉬움이 오래 머물렀다.
경기 후에는 근처의 '버거 브로스(Burger Bros)'에 들렀다.
트렌디한 바와 젊은 인파가 몰려 있는 거리,
마치 서울의 합정이나 홍대를 떠올리게 했다.
맥주 한 잔 없이도 사람들의 웃음과 음악,
그리고 시원한 밤공기 속에서 기분은 자연스럽게 들떴다.
그리고 이 버거와 타코… 정말 맛있다!
경기 보면서 간식을 이것저것 먹어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는데도
정신을 놓고 흡입했다.
달콤하고 느끼한 마요소스와 두툼한 패티가 들어간 버거,
그리고 새콤한 양념에 아삭한 샐러드가 어우러진 타코.
굳이 비유하자면 맘스터치 버거의 해외 버전이랄까.
버거 브로스는 키갈리에서 손에 꼽는 맛집 중 하나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버거가 본체지만
개인적으로는 타코가 더 인상 깊었다.
혼자 간다면 타코를,
둘이라면 버거와 타코를 하나씩 시켜
반반 나눠 먹는 게 이상적인 조합일 것이다.
르완다에서의 하루.
질서 있고, 즐겁고, 맛있었다.
인생 첫 축구 직관을 낯선 나라에서,
그리고 그 나라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버거 브로스는 말할 것도 없이 조만간 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