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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끊기고 물 끊기고, 나는 아직 괜찮습니다

Welcome to Africa

by 오즈




르완다살이 열흘째, 드디어 단전과 단수가 찾아왔다.



그동안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와이파이도 제법 괜찮았다.

나는 예상했던 것과는 꽤 다른 르완다를 경험 중이었다.

아마도 초보 자취생을 위한 유예기간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단전이었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빨래를 돌리고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나가보자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와이러는교,,



그런데 세탁기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버튼을 눌러보고, 콘센트를 뺐다 다시 꽂아도 그대로다.


뭐, 이런 날도 있겠지.

일단 아침부터 먹기로 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단전이구나.



카레와 밥을 데워 먹으려던 전날 밤의 야심 찬 계획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괜찮다.

나에겐 미리 쟁여둔 시리얼이 있으니까.


카레에서 시리얼로의 급격한 메뉴 변경은

카레만을 기다리던 내 미뢰에겐 꽤 충격적인 변화였다.


그래도 초코 시리얼에 우유를 듬뿍 붓고,

미니 바나나 한 조각을 살짝 얹어

아쉬움을 달랬다.





전기가 끊긴 거실,

시리얼을 씹는 바작바작한 소리만 크게 들린다.


자연스러운 디지털 디톡스.

어둠과 적막 속에서 먹는 아침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달달한 시리얼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혈당 스파이크를 만끽하며 단전이 남긴 당황스러움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사진보다 더 어둡답니다.



깜깜한 화장실,

작은 창틈으로 새어드는 흐릿한 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씻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확 들어왔다.

딱 한 시간 10분 만이었다.


너무 감격해서 엉덩이를 한 번 흔들고

재빠르게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빨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널려면

시간상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순 없겠지만

선크림을 한 겹 더 바르는 걸로 일단 타협했다.




물론 이렇게 평화롭게 끝났다면

나는 단전을 주제로 글을 쓰진 않았을 거다.


아프리카는 오늘 기어이

초보 자취생의 기강을 제대로 잡아두기로 한 모양이다.


단전이 끝나자

이번엔 단수가 찾아왔다.




안 나와요. 아니 안 나와요. 안 나온다고요 그냥.



다행히 미리 씻어둔 덕분에 외출 준비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세탁기였다.


세탁기 안에 돌던 빨래는 20분을 남긴 채 멈춰 있었다.

그리고 드럼 문은 단단히 잠겨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원이 꺼지거나 물이 멈추면

안전상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구조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아주 안전한 세탁기 인정!



깨끗한 빨래는 포기하더라도

축축한 옷은 바로 꺼내 널어야 냄새가 안 난다는 건

초보 자취생도 잘 아는 상식이다.



어떻게든 세탁기 문을 열어보려고

어르고 달래도 보고

유튜브를 찾아가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봤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아침부터 진이 다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뜻밖의 해결책이 찾아왔다.


바로 다시 찾아온 단전.


전기까지 완전히 나가자

세탁기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단전 때문에 못 돌린 빨래를

단전 덕분에 구해냈다.




허무하고

어이없고

그리고.. 감사했다.




건조대는 뭘 알고 있다.




한쪽 구석에 펼쳐둔 빨래 건조대가 기다렸다는 듯 웃고 있었다.



Welcome to Africa.

그렇게 르완다에서의 열 번째 아침이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에 설거지하다 또 한 번 단전된 건 안 비밀.)





+ 생활 꿀팁

고기 썰다가 단전되면 손전등을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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