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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Apr 02. 2023

팝콘꽃 탱자

지난겨울을 못 참고

대략 7년 전. 탱자나무를 심었다. 가시가 날카롭게 날을 세운 작은 묘목을 여러 그루 사다 심었다.


예전엔 담벼락 삼아 흔히 보았던 탱자나무였는데 지금은 꽤 보기가 귀해졌다. 노랗게 잘 익은 탱자열매는 그 향이 귤 못지않다. 열매는 지실枳實이라 하여 한방에서 드러 쓰이는 약재다. 약재로는 미성숙의 애지실을 쓰는데 나는 노지실이 쓰기가 더 좋다. 반황반청半黃半靑의 지실이 더 좋다 해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은근 탱자열매를 얻을 요량으로 어린 묘목을 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3년 지나 5년 지나 키만 쭈뼛하게 자랄 뿐 도무지 꽃이 피질 않는 것이었다.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내가 모르는 탱자나무도 은행나무처럼 암수딴그루인가 찾아봐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결론은 이 놈은 열매가 안 열리는 종자인가 보다 했다.


가시만 날로 날카롭고, 봄마다 살펴도 잎만 열심히 돋는다. 집 뒤편에 가시나무만 가득하니 내 심기가 불편했다. 연세 드신 분들에게 탱자열매가 열리지 않는 탱자나무도 있는지 물어봐도 잘 모르고, 혹자는 그 정도 세월에 꽃도 피지 않으면 열매 맺힐 가망이 없다는 말들이다.


참을 만큼 참았다. 내 눈에 가시 같은 저놈의 가시 많은 놈들을 없애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난겨울. 전지가위를 들고 한 놈씩 쓰러뜨린다. 질기고 단단한 놈들은 쉬 쓰러지지 않고 나랑 한참을 실겡이하다 보면 팔에 다리에 깊숙이 푹 가시를 박는다. 아 따갑다. 서너 그루 쳐내고는 일단 멈췄다. 꽃도 피지 않는 놈이 이젠 찌르기까지 하니 더 화가 났다. 아 미운 놈일세.


손톱 근처에 박힌 놈이 문제였다. 탱자나무 가시를 뽑았는데도 다음날 계속 뭔가 따끔거리고 불편했다. 피까지 났는데 피부를 스치면 속에서 쿡쿡 찌른다. 분명 가시를 뽑았는데 그렇다. 가만 살펴보니 속에 까만 점이 보였다. 이게 뭐지? 살 속에 박힌 가시는 뽑혔는데 피부 속으로 가시의 외피를 싸고 있던 가시 끝 조각이 살 속에 남아 있었다. 힘줄 같은 가시만 뽑힌 것이다. 피부 속에 남은 가시 외피 잔유물이 살 속에 박혀 계속 자극을 한 것이다.


이삼일 정도 지나서는 붓고 발적 되면서 약간의 염증소견이 더욱 뚜렷했다. 바늘로 그 잔재를 제거하지 않으면 곪는다. 화농 되면 더 골치 아프다. 긴 대바늘로 피부를 헤집어 깊이 박힌 검은 가시의 외피를 빼낸다. 내년 가을에 남은 놈들을 모조리 베어내리라.


그렇게 봄이 왔다. 살아남은 놈들은 살아남은데로 새순을 내민다. 어이구 그래 올해가 마지막이야. 그렇게 탱자나무의 가시 끝에 난 새순들을 도끼눈으로 쳐다보다 문득 처음 보는 하얀 망울이 보였다. 이물질이려니 했다. 그런데 너무 놀랍고 고맙게도 그 하얀 놈들이 점점 하얀 팝콘처럼 점점 커지더니 노란 꽃술을 드러내며 활짝 핀 것이 아닌다. 아니 세상에 무려 7년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꽃이 핀 것이다. 물론 아직은 몇 송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은 후 처음 본 꽃이다. 고맙다.


순간 시선이 옮겨진 것은 작년 겨울에 잘린 탱자나무들이 살아남은 놈들 옆에 누렇게 말라있다. 너무 미안하고 아까웠다. 서너 달만 참을걸. 아이고 안타깝다. 내 인내심 부족이지만 나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변명해도 미안하고 아쉬웠다. 혹 탱자나무를 기를 일은 드물겠지만 부디 칠팔 년은 기다리길 부탁한다. 아니 넉넉히 십 년은 키운다고 생각하시길.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누군가 금맥을 찾아 돈을 쏟아붓다 포기하니, 그다음 헐값에 금광을 인수한 사람에게서 바로 1m 밑에서 금맥을 발견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키우기나 했는지 의문이다. 물을 열심히 준 것도 아니고, 거름을 듬뿍 준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린 묘목을 심었을 때 잠시 밑밥을 깔았을 뿐 그 긴 세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왜 이놈들이 꽃을 피우지 않는지 타박만 했었다. 오늘 피운 팝콘 같은 탱자꽃도 저 혼자 악전고투하면서 큰 것이다.


은근 나만의 합리화를 떠올린다. 내가 작년 겨울에 놈들에게 한 짓으로 남은 놈들이 겁먹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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