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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Feb 04. 2024

갑각류

단단한 외피의 취약함

어리고 젊은 나이에 학업이나 재능이 뛰어나 주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스스로의 자부심과 함께 엄청난 부담이다. 그런 우쭐함과 어른들의 칭찬 상황이 자칫 자만심으로 발전한다면 안하무인의 시각을 가지게 되며, 자산의 말의 힘을 알아차릴수록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무시하게 되고, 그의 성취가 꺾임 없이 지속되고 상승한다면 그는 이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의인 실수나 잘못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게 된다. 그게 왜 안되냐고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혹 그의 성취가 어느 순간에 멈춰도 정상을 맛본 경험이 평생의 잣대가 되어 그 시절의 도취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굳어진다.


가끔 키 작은 이들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은 저렇게 키가 작은데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까 싶지만, 그의 키는 초등학생 어느 시절에 다른 애들보다 월등히 키가 컸던 시점이 있었던 거다. 한 때의 우월한 군림의 시간이 그에겐 절대적 정점이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그의 성장은 더디고, 다른 친구들은 사춘기를 거치며 키가 쑥쑥 커도, 그에겐 한 때 본인보다 작았던 그들이었고, 친구들은 예전 키가 컸던 그로 기억한다. 


식당을 하면서 힘들게 사는 부모의 삶을 보면서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가 보다. 그 시절 부모들은 그들의 못다 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욕망이 강했고, 자식들은 부모의 꿈을 제 꿈인 양 그 꿈을 이뤄드리고 싶은 욕심과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게 지상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노력한다.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모의고사에서 전교를 넘어 전국 석차의 등수에까지 들어간다. 까마득한 선배들에게나 있었을 법한 사당오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일본식 대학입시 분위기)을 지키고,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아예 교과서 전체를 외워 어떤 문장이 어느 페이지 문단 몇 째 줄에 나온다는 것까지 암기한다. 문제를 풀면 물음표가 나오기 전에 이미 정답이 나왔다. 우리에게 그는 컴퓨터요 사전이었다. 어려운 문제에 그의 풀이 답은 이미 기정 정답임을 간주하고 받아들여 우리끼리 벌써 맞네 틀리네를 결정할 정도였다. 


리고 대망의 명문대 법대 입학. 우린 부러움의 시선을 넘어 다른 종족의 인간으로 그를 취급했다. 그리고 그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이 되고, 우리의 자랑이 됐다. 그런 친구를 아는 것만으로도 권력이 되는 듯이. 그와 친하려고 해도 오르지 못할 높은 벽으로 여겨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고, 이제 그의 더 큰 성공을 위해서는 그를 가만히 둬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 


거칠 것 없어 보이던 그에게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사법고시. 졸업 전에 사시를 통과할 거라는 장원급제의 전망에서 그건 너무 무리라며 몇 수는 여유 있게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진행과정을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했다. 시험의 결과를 매 번 물어볼 수도 없지만, 그런 물음이 그에겐 더욱 부담감을 줄 테니 시험공고가 나고 시험 일정이 끝나도 다들 궁금함을 누르고 눈치만 살폈다. 다만 부모들끼리의 계모임을 통해서 그의 소식을 건너 들을 뿐이었다. 


졸업 때까지 그의 합격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의 고배와 좌절. 친구들은 그래도 동문의 자랑인 그에게 가끔 위로주를 사주고 힘을 내라는 응원을 보낸다. 그렇게 그가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사이, 오히려 고등학교 후배에게서 먼저 고시 합격 소식이 들렸다. 골목에 축하 플래카드가 걸린다. 그중에 하나는 하필 그 친구 집 앞 입구에 걸렸다. 부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당황하고 괘심해 했지만, 악의적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당 앞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으로 플래카드를 걸기 좋은 장소였으니.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린 각자의 생활에 바빠 차츰 그의 근황은 소망에서 가십 소문으로 밀렸다. 그리고 그가 고시원에서 방을 뺐다는 후문만 있었다. 사법고시가 참 쉽진 않구나 이해를 하면서도 포기를 한 그를 아쉬워했지만, 우린 그의 재능이 아까웠다. 그래, 꿩 대신 닭으로 그가 다른 공직으로 진출할 수도 있을 거 같다며.


그런 그가 나타난 장소는 너무나 뜻밖에도 부모의 식당이었다. 사실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다른 기회들이 있었다. 어느 대기업에서는 그에게 고문 역할을 부탁하기도 했고, 사법고시가 아닌 다른 고시를 권유받기도 하고, 관련 학술단체 영입 제안이 있기도 했다. 자존심의 문제였을까? 아님 거창한 사업의 계획이 있었을까? 그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조용히 부모님의 식당으로 왔다. 그가 식당으로 온 사실은 몇 달이 지나서 친구들에게 알려졌고, 그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가 보다. 묵묵히 새벽 시장을 들러 장을 보고, 식당 홀에서 행주를 쥐었다. 


식당을 찾아온 친구들은 영업 끝나면 한 잔 하자며 그를 부른다. 차마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기에는 뭣했고, 대충의 짐작으로 그의 도피를 추측했을 뿐이다. 그렇게 드문드문 친구들의 내왕이 있었다. 막상 주변의 몇몇 외에는 그와의 교류가 많지 않았고, 그 자신이 활동 범위를 좁힌다. 스스로 고립과 외면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처음의 사회에 비판적이던 그의 시각이 어느 날부터 보수적으로 바뀌면서 정치나 이슈에 대한 그의 견해에 타협의 여지가 좁아졌다. 보수세력의 본질을 파해지고 분석하고 깨기 위해 보수 언론지를 본다더니 오히려 점점 그 시각에 젖어듦을 넘어 우파적 논리로 수구의 선을 넘는다.


학창 시절의 기억과 논리적 주장의 합리화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으려나? 아직도 그의 고교시절 추억에 주눅 드는 친구도 있고, 현재의 확고한 신념에 찬 그의 강변에 수긍하며 반박거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친구도 있다. 어쩜 주변인들이 아직도 그에게 환상의 벽을 만들어주고 있고, 그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고 다른 이의 침범과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억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견해도 다양한 상황의 일부분일 뿐인데도.


그렇게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공? 방식을 고집하기도 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식당은 문 닫고, 삶이 더욱 팍팍해지고, 그의 생각은 기울어진다. 병든 노모를 요양시설에 보낼 돈도 돈이지만, 그런 곳에 부모를 보낼 수는 없다며 직접 수발을 하고 병시중을 든다. 친한 친구들은 그에게 경제활동을 해서 돈을 벌고 간병인을 쓰라고 권해도 그는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니 본인이 직접 하는 게 맞다는 주장이다.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닌데 그는 그게 편한가 보다. 그렇게 그도 늙어간다.


갑각류가 성장을 하면 지금까지의 외피를 벗어야 한다. 속에서 무르익어 성숙의 한계에 다다르면 탈피를 해야 한다. 딱딱한 외피를 뚫은 탈피의 순간이 갑각류에게 가장 취약하고 위험한 상황이다. 그래도 탈피를 하고 나와야 한다. 성장의 탈피를 하지 않는다면 이미 작아진 갑옷 속에서 압력을 비티기 힘들다. 기괴한 변형을 일으키거나, 곪거나, 제 살을 파먹을 수는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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