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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r 22. 2024

시작의 범위

어디까지 목표로 할 것인가

요즘 무슨 공부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특별한 것은 없고 원전을 읽으며 토론하는 모임에 참석한다고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자기 공부 점검을 하는 정도라며 가볍게 얘기한다. 원하면 같이 해도 된다고. 얼마나 공부했냐고 물으니 본인도 얼마 되지 않았단다. 1년 정도. 나름 만족하는 표정이다.


한의학의 근본을 알고 싶은데 책으로는 답답함이 있었다. 증상에 맞는 처방을 찾는 수준을 넘어 음양에 대한 이해와 오행의 운용이 궁금했다. 더 나아가 인체의 본원을 알고 싶었고, 그 깊이에 다가서면 생리 병리의 원리를 알 것 같았다. 같은 질병이라도 처방이 다른 동병이치同病異治의 원리라든지, 다른 병이라도 치료법이 비슷한 이병동치異病同治의 연유를 이해해야 현장에 응용할 수 있음이라.


질병의 변화무상함에 맞춰 치료법을 그때그때에 맞게 바꾸어 음양의 균형을 찾으려면, 질병과 치료의 일대일 대응 같은 대증요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슨 병에 어떤 처방을 쓰라는 매뉴얼식의 짝 맞추기는 쉽고 간단하고 편리함이 있지만, 너무 단편적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다. 일면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하면 실수를 줄이고 진료하기도 쉬울 순 있을지 몰라도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그 기준이 달라지면 매뉴얼 전체가 오류가 생길 수 있으니.


다양한 변화에 부합하는 묘용을 맞추려면 근본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그 뿌리를 찾는 게 쉽지 않다. 결론은 병리를 일으킨 생리의 순환장애 원인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장애가 생긴 이유를 따져봐야 전체가 보일 것 같았다. 세상사의 인과법칙이 인체 내에서도 똑같이 작용함은 당연하지 않나. 왜 그런지, 그럴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전체 얼개가 보일 것 같았다. 이게 내가 그 공부 모임에 참석한 이유다.


모임의 인원은 많지 않았다. 십여 명. 그전에 많은 이들이 여기를 거쳐갔다는 말을 들었다. 대부분 3~5년이면 떠나더라는 게 선배들의 말이다. 그들은 머리가 좋은 거지. 핵심을 파악한 거야. 이 정도에서 요점 파악은 끝났고, 심화의 과정은 요원할 뿐 아니라 궁극은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지. 아직도 여기 남아 공부하는 이들은 미련하고 아둔해서 못 떠난다고 봐야지. 우리처럼.


시간이 지나 몇 년을 넘겼다. 나를 소개해준 친구는 이제 모임에 그만 나오려 한다고 한다. 대충 원리를 알게 됐고, 처방을 혼자서 낼 정도는 공부했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며. 이 공부를 시작했을 때의 목표가 처음부터 원리 파악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자는 것이었다며.


다시 십여 년이 지났다. 이젠 모임의 인원도 많이 줄었다. 모임의 시작부터 해서 지금까지 유지해 온 선배 두 명과 중간에 참가한 나머지 인원을 합하여 열 명이 안된다. 이젠 이 공부에 관심을 가지는 신입 회원도 없다. 빨리 배울 수 있고, 금방 써먹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치료법을 배우길 원한다. 이 모임과는 거리가 있다.


내겐 시간이 가면서 공부의 진도가 더디진다. 조금씩 정리가 되기도 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도 아직 남아있다. 그래도 생기의 흐름이라는 큰 틀에서의 접근법으로 인해 오진이나 오가 줄어든다. 방향성은 틀리지 않았어도 정확성은 아직 아쉽다. 그렇게 탁마의 과정이 필요한가 보다.


등산의 목적으로 산에 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도 하고, 정상 도달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고, 하산해서도 몸에 무리가 되지 않게끔 천천히 걷는 속도 조절 여부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체력 안배의 차이가 있다. 처음의 목표 설정에 따라 다양한 걸음들이 있다. 그러니 시작할 때에 어디까지 할 것인가에 대한 범위를 정하는 게 한계를 지운다. 어느 정도까지를 할 것인지 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맞고 틀리고가 아니다. 다만 그 정도쯤에서 그치게 되고, 그 정도를 이루기 위해 나아간다.


시작점에서부터 바라보는 정도를 정해놓 범위만큼 받아들이고 나아가게 된다. 

큰 집을 지으려면 기초를 깊게 파내려 가야 한다. 물론 간단한 조립식 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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