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월 Mar 21. 2024

연보라 향기

바람결에 실려온 라일락

햇살 나른한 한낮의 봄날. 완연한 봄 속에서 걷기는 아지랑이 걸음이 된다. 내가 걷고 있는 건지, 공기 속을 흘러가는 건지. 걷다가 어딘가에서 언뜻언뜻 바람결 따라 향기가 난다. 어딜까? 무슨 꽃일까? 아니면 조금 전 스친 여인의 향긴가?


정원 한쪽에 연보라 라일락이 활짝이다. 아련함이란 이런 것인가. 라일락이 피면 떠오르는 여인은 격한 감정의 동요보다 서서히 물들 듯이 젖어드는 연민으로 마음에 배어있다. 세월이 지나도 그 여운이 빠지질 않으니 속을 간지럽히듯 살랑이는 은은함이 더 깊다.


오래전의 일이다. 도와 달라는 선배의 부탁으로 참가한 모임에서 만난 그녀는 키 작고 단아하고 깊은 눈을 가졌다. 그녀는 별 말 없음에도 차분한 존재감이 있었다. 이과생의 논리와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수성과 문학적 예술성으로 내 속에 있던 섬세함을 일깨워줬다. 남자가 인형을 갖고 노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나요?


일을 하면서 그녀와의 어색함이 가실 무렵 그녀는 내게 선물을 건넨다. 노르웨이 숲. 책을 잘 읽지 않던 나는 그날 밤을 새워 마지막 장을 덮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이 부럽더라고 주인공에 대한 나의 독후감에 그녀는 그저 웃고 만다. 왠지 잘 보이려고 가까워지려고 하는 내가 어색했지만 뿌듯했다.


일이 끝나고 혼자 마무리할 때였다. 귀가한 줄 알았던 그녀가 왔다. 차 한잔 해요. 한 참을 우린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그때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기억은 없다. 다만 주관이 뚜렷한데도 주장은 하지 않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 언제든 꽃을 피울 수 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는 깊음이 인상적이었다.


겨울도 막바지로 일이 끝나고 마지막 쫑파티에서 술잔이 오가고 선배는 내게 갑자기 노래를 시킨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고 그녀를 의식하며 나는 어색하게 일어났다. 목을 가다듬는 헛기침과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부른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더 이상 만날 명분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지만, 우린 연락을 했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봄날 라일락이 핀 동네 서점 거리에서 그녀는 분홍 루주에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랑게의 꽃노래가 딱인 모습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끔 밤새 전화를 하기도 하고, 밤하늘 별을 같이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도 거리를 둔 채 우린 각자의 길을 갔다. 내겐 내가 가야 할 길이 있었다.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었고, 불안정한 미래를 향해 차마 동행하자는 말을 하기엔 앞 날들이 너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후 그녀는 결혼을 한다는 말을 건넨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몇 초간의 긴 침묵. 내 답변을 기다리는 걸까?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떻게 결혼하게 됐고, 누구랑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혹시나 하는 약간의 가능성이 영영 날아가 버렸구나 하는 아쉬운 욕심이 내속에서 일어남을 본다. 그래, 잘 살아요. 잘 지내고. 나중 지인을 통해 그녀가 애를 낳았고, 외국으로 가게 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후 연락이 닿게  날. 부모님은 어떠신지, 가족들은 잘 있는지 등의 의례적이고 어색한 얘기들이 오갔다. 말이 길어질수록 그녀 음성이 갈라지고 음색에 탁한 습기가 묻어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변했으면 변한 대로 아픔이 있으면 아픈 그대로 만나보고 싶다. 추억을 박제로만 걸어두고 고개 돌려 한 번씩 쳐다보는 식의, 그땐 그랬지라며 오랜 사진을 들춰보듯 아무렇지 않은 척 묻어두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상처를 건드리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든 저렇든 변한 실제 모습 그대로 보고 싶은 거다.


며칠 전 짙은 안개로 새벽길을 더듬었다. 느리게 지나치는 차량 뒤로 가로등 불빛에 수분이 따라가며 산란한다. 다음날은 종일 비가 내린다. 어제는 느닷없이 돌풍이 불어 밤새 길 옆 대숲의 대나무들이 죽도 들고 합을 다투듯  딱 다닥 봄이 시끄럽다. 꽃이 필 때가 된 거다.


그렇게 우린 라일락 피는 햇살 가득한 날에 다시 만나기로 한다. 잠시.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