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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Jun 05. 2024

궁핍의 힘 1

형제들 간의 묵은 감정들

외가의 친척들은 가깝고도 먼 관계였다. 어려서는 1년에 몇 번씩 오가며 서로 친분을 쌓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때부터 서로 뜸해졌다. 또래의 외사촌들과도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각자의 삶이 힘들어 그런지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됐다. 쩌면 엄마가 형제들과 소원해지니 자연스레 자식들도 왕래가 드물어진 것 같다.


경제력의 차이가 그 거리를 더 멀어지게 했고, 형제들의 강력한 응집력 역할을 한 큰외삼촌의 사망으로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이름만 혈연인 친척이 되어버렸다. 먼 거리 아닌데도 남이 점점 없었다.


엄마는 친정에 대한 특히 오빠들에 대한 한恨이 많았다. 오빠들이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첫째 딸이었던 엄마는 오빠들 뒤치다꺼리까지 하다 결국 국민학교를 체 마치지 못했고,  그나마 밑의 두 여동생들은 언니를 앞세우고 눈치 보며 국민학교 졸업 정도는 했다. 장남 위주요, 아들 중시가 당연시되던 사회 분위기에서 외갓집에서도 딸들에 대한 교육은 중요하지 않았던가 보다. 글 짧음에 늘 마음 편치 않던 엄마는 한참 나이 들어 어른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긴 했지만, 원활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그만두게 됐다.


운이 좋았는지 경제의 흐름을 읽었는지 몰라도  외삼촌들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주유소 사업을 시작했다. 7080년대의 주유소 사업은 유가의 급등과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그야말로 황금시장이었다. 시쳇말로 갈고리로 돈을 긁어모으는 정도였다. 다만 그러한 부의 축적이 남자들만의 리그이었을 뿐이다. 엄마나 이모들에겐 낙숫물이 흐르지 않았다.


쯤 외삼촌 댁으로 놀러 가면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데 그 달콤한 향기에 침이 고이면서도 젓가락이 쉽게 가지 못했다. 입안 가득 먹고 싶었지만 못 사는 티를 내는 게 싫었었다. 뒤늦게 동석한 외사촌들은 또 고기냐며 투덜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밥은 먹어라는 외숙모 말에 입맛이 없다는 표정으로 겨우 고깃 국물에 밥 몇 술 말아먹고 일어서면서, 고기는 씹어 삼키기에 질기다고 했던가.


그런 외사촌들에게 공부는 흥미 없고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외숙모는 곧잘 나와 비교하며 외사촌들에게 내 본 좀 받아라고 하면, 그들은 입을 삐죽거렸다. 언뜻 지나가는 말이 하필 내 귀에 들렸다. "못 살면 공부라도 잘해야지."


나도 참 둔한지, 그 경멸의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경제관념이 약하지만, 그때도 그 말에 학생이니까 공부를 하는 거고, 그게 당연한 일이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와 돈이 연결되지도 않았고,  돈 많이 버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고, 돈이 권력이요 학벌이 밑천임을 알기엔 어렸고 막연했다.  


사는 게 힘들었던 엄마는 몇 번을 망설이다 그래도 힘들 땐 형제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오빠 찾아갔다. 놀러 가는 일이야 불러주니 갔지만, 돈 없고 아쉬워 제 발로 오빠를 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셋방 월세가 밀려 얼마라도 융통을 바랐던 엄마는 자존심을 접고 찾아갔던 오빠에게서 모진 말을 들어야 했다. '돈 얘기 할 거면 여기 발도 들이지 마라'  내침을 당했던 거다.


슬프고 비참하고 억울한 마음에 집으로 오는 길에 엄청 많이 울었단다. 오빠의 말투와 눈빛이 1년 넘게 잊히지 않았다며, 그 말을 꺼내는 지금도 눈에 선한가 보다. 평생 각인된 말로 남아 섭섭함이 울컥거린다. 아마 외삼촌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없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엄마도 그렇지만 이제 모두 80세를 넘긴 나이에 다들 몸이 성하지 않다. 누구는 허리 수술하고, 누구는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고, 누구는 중풍 후유증으로 앓고 있으며, 치매가 오기도 하고. 그나마 엄마는 허리와 무릎의 퇴행성으로 인한 통증이 있어도 수술을 하지는 않았다. 본인 말로는 돈이 없어서 그랬노라 했지만 수술한 주변인들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에 수술은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나 보다. 수술을 해도 여전히 진통제를 한 움큼 먹는 걸 보면서 통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에 수술로 통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나름의 믿음이 생긴 거다. 


몇 해 전 어떤 사건으로 인해 엄마가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 동생집에 며칠 기탁할 일이 있었는데, 이모는 엄마의 행상과 상황을 파악한 후 별 소득 없음을 알아채곤, 본인도 힘들다며 오빠네로 가라고 권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도 비 오는 날 새벽에 깨워서. 나중 이 일을 전해 듣고 나는 외가 친척들의 계산법칙이 여전함을 확인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이제 다들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지 엄마에게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오고, 엄마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뭘 별실이 뭘 따로 보느냐고 퇴짜를 놨다. 이모는 전화로 언니 한데 미안하다며 그때는 그랬노라 했다지만, 엄마는 걔가 과거에도 그러한 다른 일이 있었다며 만남을 거부했다고 한다.


같은 형제들이라도 경제적이든 성향적으로든 서로 비슷해야 어울리나 보다. 그러나 이제 정말 내일을 모르는 나이가 됐다. 나는 엄마에게 그러지 말고 이제 만나보라고 권해본다. 어쩌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으니, 풀지 못한 매듭의 후회가 아쉬움으로 남느니 그냥 다 지나간 것들은 털고 만나보라고 떠밀어본다. 어쩌면 엄마도 내심 형제애가 그리웠는지 자식들이 준 용돈을 나름 모으고 있었던가 보다. 그래 나도 이제 부자다. 딱히 부족할 것도 없으니 부자다. 그래, 내 한번 보자고 할게, 내가 밥값 낼 테니 다들 얼굴 한번 보자고.


그렇게 엄마는 지금 살아남은 형제들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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