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이입에 대한
3일째 울음소리가 난다. 옆집에 사는 여인이다. 결국은 동물병원에 가서도 해결을 할 수 없었나 보다. 물론 반려견의 나이도 많았지만 생사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개 사진 앞에 향이 피워져 있고, 그놈이 좋아했던 간식이 놓인 탁자 앞에서 그녀의 곡소리가 집밖으로 흐른다.
처음부터 그녀가 개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밤에 예고도 없이 남편이 강아지를 안고 집에 왔다. 어떻게 된 사연이지 설명도 없이 데려온 강아지에 그녀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강아지는 귀엽고 똘똘해 보이고 잘 생겼지만, 한 생명체를 거두며 떠안게 될 일들이 번거로웠다. 개의 분변처리라든지 때에 맞춰 먹이를 먹이는 게 성가시고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났다. 멀리 며칠 여행을 가는 일도 신경 쓰이고, 동물병원에서의 진찰비도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남편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데다 하는 짓이 이런 미운 짓만 골라하는 것 같아 그 감정이 고스란히 개에게 넘어갔다. 개는 무슨 개냐며 당장 데려가라고 했지만 개에겐 선택권이 없다. 애완견을 갖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밖에서 낳은 자식을 데려오듯 개를 떠넘기는 남편에 그녀의 팔짱 낀 눈이 날카롭다.
마티즈종의 강아지는 그렇게 눈칫밥을 먹게 됐다. 그러다 남편이 미운거지 개에게 무슨 잘못인가. 함께하는 공간에서 애증의 시간이 변한다. 어쩔 수 없는 동거로 점점 친숙해진 개는 이젠 그녀와는 떨어질 수가 없다. 어딜 가든 동행이다. 근처 슈퍼는 물론이고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붙어있다. 이젠 그놈의 밥 먹는 모습에, 짖는 소리에, 흔드는 꼬리짓에, 따라다니며 치우는 똥에도 정이 간다. 에구, 동글동글하니 예쁘게 잘 보네.
5년 전 정기검진하다 발견된 초기암으로 수술하러 갈 때도 남편은 일이 바빠 갈 수 없다고 해서 그녀 혼자 입원했었다. 그러다 알게 된 남편의 외도. 지금은 이혼한 그녀이기에 전남편이 하는 모든 일이 맘에 안 들었지만 그가 데려온 강아지에 덕분에 그나마 반려의 대상으로 위로를 받았고 위안이 되었다. 그 빈자리를 녀석이 채웠었는데 이제 그만 떠나갔다.
부친이 돌아가신 때도 그리 슬퍼하지 않았던 그녀의 곡소리는 처량함을 넘어 혼절할 정도다. 조용해지는가 싶다가 다시 울음소리다. 귀가하면 늘 반기던 반려견의 죽음에, 그 친숙함의 상실이, 무척 허전하고 아쉽고 슬픈 일이겠지만,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는 나의 평소 생각은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부족하다.
한 번은 개를 안고 산책하는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내가 겪은 일을 얘기한 적 있다. 어느 여름날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 약속된 식당에 갔는데, 반려견을 안고 식사하는 젊은 부부가 옆테이블에 있었다. 더위에는 삼계탕보다 보신탕이라며 찾아간 그 식당에서 그 부부는 개를 안고 개를 먹더라고. 그럴 수가 있느냐며 말해놓곤 후회했다. 내가 그녀를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라며 고개를 흔들고 사라졌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남편이 데려온 강아지는 그의 외도녀가 데리고 있던 새끼 중 한 마리였다. 이혼 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십여 년 가까이 동반자로 지낸 이 놈에게까지 미움이 더해지진 않았다. 죽은 개는 어쩌면 미움과 미련의 대상이었을까.
그렇게 세상 떠내려갈 듯 나던 울음소리는 없다. 너무 조용하다. 주말이 지나고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을 한다.
상처가 아물어도 다 나은 것은 아니다.
상처 부위의 주변 조직까지 원래 기능을 되찾아야 회복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