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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Nov 13. 2024

흑백 추억

컬러보다 더 깊은

우연히 들른 숙박지 테이블에 놓여있던 책 한 권. 사진첩이다. 작품이려니 했다. 풍광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찍은 사진들일거란 생각에 별 뜻 없이 펼쳤다. 자리에 앉아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않고 지나치듯 서서 후루룩 훑어보고 내려놓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빠져들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처음엔 애들 노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려니 했다. 애들 커가는 모습을 기억하려나 했다. 그런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나 예쁘게 찍히려 웃거나 V자 손가락을 한 모습을 찍은 게 아니다. 자식의 탄생에서 젖을 빨고 칭얼대다 엄마에 안겨 잠들고 놀고 장난치는 모습을 지나 훌쩍 자란 사춘기의 순간까지.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피사체는 그냥 아빠랑 놀고 얘기하다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애들이 커가면서 카메라를 의식해 포즈를 취하거나 억지 폼을 잡기 시작하는 때쯤에 작가는 기록을 멈춘다. 노출을 꺼려하기도 하고, 무심한 자연스러움을 더 이상 찍기 힘들었던가  보다.


너무나 평범한 하루를 작가는 책으로까지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별 특별할 것 없는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일반에 내놓을 용기가 일상에 대한 보편의 힘을 모른다면 힘들다. 얼굴이 아니라 얼굴의 표정을, 그 상황을 담는 행위가 작가에게는 그 자체로 기쁨이었을 테고, 그걸로 충분함을 잘 알았지 싶다. 사진으로 건네는 언어가 몇 마디의 말보다 짙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모든 이들의 향수를 자아내는 그림들은 아련한 감동이다.


얼굴이 노출되어 출판을 저어함 직도 한데, 너무 낱낱의 일상이라 부끄러울 수도 있는데, 가감 없는 그 솔직함의 힘으로 새겨진다. 발가벗겨져 길가에 서있는 모습처럼. 그런데 가만 보면 다들 옷으로 가리고 있지 속살은 누구나 그렇지 않나. 드러내고 당당할 필요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치장 없는 알맹이의 자연스러움이 힘으로 보인다. 범상의 힘.


기록을 단순 사실 나열이 아닌 부성애 짙은 가족애남겼다. 성장의 순간들이 배경에 보이는 시대와 겹치면서 보는 이  누구나에게 동감과 공감을 준다. 잘 살지는 못해도 가난하다고는 느끼지 않은, 누구나 그렇게 고만고만 행복하게 살던 어린 시절. 그래 맞아, 그땐 우리 집도 그랬는데. 사진을 남겨 다시 안 올 유년기의 추억을 끄집어낸다.


멀리 타지에 사는 딸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 내게도 딸이 있다면 작가처럼 직접 사진을 찍어 남기지는 못해도 이 책을 한 권 넣어주고 싶다. 그리고 책 여백에 이렇게 쓰고 싶다. '지금쯤 너도 나처럼 저 달을 보고 있겠지.' 추억이 아름다운 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일까? 지나간 과거는 기억에만 흔적을 남겨 찾을 수 없으니.


아득히 먼 은하도 우리 은하와 기본 구조는 동일하며, 우리 은하 내 다른 항성과 행성들도 수소와 헬륨을 기본 구성으로 하며, 인력과 중력의 물리적 힘이 같은 원리로 작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안도감. 저 별들과 내가 사는 지구가 근본적으로 같구나 하는, 다른 특별하고 특이한 무엇에 나만 못 미칠까 하는 두려움은 혼자만의 착각임을 일러주는 깨우침. 타인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하루. 누구나 맞는 아침. 


대단한 위인들도 지금의 나와 똑같이 햇살을 쪼이고 있고, 감정의 변화에 기분이 널뛰고, 밥을 먹고 하루를 산다. 일상을 벗어나는 어떤 무엇도 있을 수 없고 그걸 따라가거나 부러워할 것 없다는 확신이 안식을 준다. 그런 하루, 그런 일상. 그 외의 그 밖은 없으니. 그래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기쁘고 감사하다.


<윤미네 집>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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