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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부채와 실리

by 노월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려서는 여자의 촉이 더 날카롭게 작용한다. 성실한 K의 입장에서 할 말이 없진 않겠지만, 그의 부인에겐 일의 부지런함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친분과 의리가 다가 아님을 일깨운 사건들이 있었다. 은근히 남편의 어리숙함을 탓하고, 사람을 쉽게 믿어 곤란에 빠지게 됨을 못 미더워하고, 술과 친구 좋아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함을 타박해도, K는 신의를 저버리는 놈으로 추락하진 않았다.


빚보증의 위기를 넘긴 것도 그녀의 감각적 눈치챔이 역할을 했고, 꽃뱀에 빠진 K를 중간에서 확실한 차단막으로 K의 남우세스러운 조롱을 모면했다. 취중 폭행으로 유치장에서 꺼내온 것도 그녀고, 무턱대고 아파트 입주 계약을 한 K를 앞세워 부동산의 하자여부를 찾아내 가격 조정한 것도 그녀였다. K에게 그렇게 몇 번의 일들이 부인의 조언과 조정으로 해결됐으니, 그가 큰 일에 앞서 그녀의 눈치를 보는 건 당연했고, 이후 일견 불합리하고 무리한 그녀의 딴지 같은 의견일지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서 거둬들인 수확을 안에서 잘 일궈야 재산이 쌓인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요모조모 따지고, 셈하고, 재고, 계산하고, 아껴야 잘 살 수 있다. 돈 잘 버는 것보다 돈을 모으고, 새는 돈을 막는 게 일만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꼼꼼하게 살폈기에 그나마 지금 이렇게 사는 거야라고.


평소의 주도권이나 소소한 집안일의 대소사 관련 장악력에선 K의 입김이 앞서지만, 결정적 판단에선 부인의 의견을 누르고 K가 강하게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길 주저하는 이유들이 쌓였다.


다니던 직장에서 정비직을 배우고 사표 내면서 자영업을 위한 장소를 모색하던 때였다. 구색을 맞춘 자리는 권리금을 포함하여 금액을 맞추기 쉽지 않았다. 아예 빈터에 땅을 빌려 건물을 올리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알아낸 터에 전세를 걸고 가건물을 올리면서 정비소 일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리저리 직접 발로 뛰면서 깎을 거 깎고 싸고 좋은 물건을 구하면서 개업자금을 아낀다. 건물이 올라가고,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딴에 꼼꼼히 준비한다고 했지만 미비 서류가 있었던지 허가가 나지 않았다. 설마 이걸 다 해야 할까 하고 넘어간 일들이 발목을 잡았다. 싼 물건을 찾고 저렴한 인건비를 제시하는 업자에게 일을 맡긴 탓이었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업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K는 밤잠을 설친다. 그때 도움을 준 이가 고교 동창생 시찬이었다.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던 시찬은 자칫 무허가 판정을 받아 건물이 뜯길 뻔한 정비소를 정상으로 이끌었다. 설계도면과 정수 및 정화시설의 수정보완으로 무사히 사업 허가를 받고 나서야 일을 시작하게 됐다. 약소한 사례가 있었지만, K는 시찬에게 아찔하던 때의 도움에 구사일생의 깊은 고마움을 느꼈으며 마음의 빚을 진 거라 생각했다.


정비소를 시작하고 십여 년이 흘러 약간의 자금이 모였을 때 K의 부인은 땅 소유주에게 매매의도를 물었으나 지주는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며 거부한다. 이제 자리를 잡았고 주변 입지를 다져온 입장에서 돈을 모았다고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재개업하기엔 단골이 아까왔고, 다시 시작할 때의 초기 정착의 어려움을 알기에 땅 매입이 무산된 아쉬움이 컸다.


정비소 땅의 매매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K의 부인은 한동안 땅을 보러 다녔다. 지금의 정비소와 좀 떨어져 있지만 나대지를 구했다. 그녀의 부동산 안목은 모르지만 부인은 자신의 감을 믿어달라며 K에게 동의를 받아내고, 언젠가는 본인 덕 볼 날이 올 거니, 지금은 던져두기 식으로 사두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며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몇 번의 아파트 갈아타기 성공이 밑바탕이었던가 보다.


세월이 흘러 정비소 지역에 재개발 소식이 들리더니, 기어코 조합이 구성되고 재개발은 현실화되었다. 남은 시간이 일 년 안쪽이었다. 장소 이전을 생각하면서 집을 짓는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둘 필요 없다며 K는 바로 시찬을 떠올렸다. K는 시찬에게 정비소 이전과 관련 건축 설계를 맡기고 싶어 했다.


그렇게 K는 부인과 함께 시찬을 만났고, 서로의 의견이 오갔으며, K는 주변에 자신이 시찬에게 건축일을 부탁했고, 나름 묵은 빚을 덜어내게 됐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문제는 K의 부인이 시찬을 못 미더워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 공간엔 화장실이 두 개가 있어야 해요.- 네 그렇게 하면 되죠. - 여긴 밖으로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고요. - 네, 큰 문제없겠네요. - 땅이 경사진 곳이라 위층은 이층 같은 일층이 되게 해 주면 좋을 거 같네요. - 네, 요즘 그런 식으로 많이들 지어요.


옆에서 듣던 K는 그들의 대화에 큰 문제없다고 여겼는데 부인은 아니었던가 보다. 아니, 제시하는 사항에 네네 하는 소리만 한다고, 제안에 대한 다른 대안은 전혀 제시하지도 않는다고. 해서 건축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을 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의뢰인에게 하는 꼴이 무성의하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세부사항에 대한 논의나 다음에 대한 기약 없이 만남은 그걸로 끝나고 시간이 흐른다.


그 소식을 들은 지가 몇 개월 전이다. 우려의 의견도 있었다. 친구를 믿는다고 맡긴 일까지 믿을 만 한지는 다르다고. 그러다 문제가 생겨해야 할 말은 친구사이라 못하고, 친구는 친구대로 멀어질 수도 있다며. 반면에 시찬과 연락이 잦은 친구는 시찬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 친소 여부를 떠나 시찬의 건축물을 본 적 없어 어떤지 물어봐도 친구를 못 믿느냐는 핀잔이다.


K 부인의 의구심이 이해 가는 측면도 있었으나 K는 시찬에게 일을 맡기고 싶어 했다. 나이가 들면 부인의 말을 들어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익숙한 얘기로 K에게 어찌할는지 물어본다. 그런데 K는 지금까지 알던 부인의 역할이 사실은 다르단 말을 한다. 빚보증을 선 게 아니라 형제끼리의 관심사를 말하다 보니 마치 보증을 선 것처럼 말이 와해되었고, 꽃뱀은 무슨 그것도 결혼 전의 일이었단다. 말이 전달되는 과정의 어감차이가 이렇게 다른가 싶지만 굳이 삼자대면을 할 것 까지야.


옆에서 누군가 시찬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 설계는 잘 되냐? - 설계는 무슨. 아직 아무런 계약도 없었는데. - K는 네게 의뢰했다던데 - 궁금한 것만 물어보더라. - K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 야, 나, 시찬이야. 믿으면 끝까지 간다. 아버지가 왜 내 이름을 시찬이라 지었겠냐. - 그래, 그렇구나. 잘 지내고 다음에 보자.

각자 하고 싶은 말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기엔 뭔가 궁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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