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그늘 하나

허전함을 채우는 푼수

by 노월

거친 비바람이다. 예보를 통해 폭우의 경고를 알고 있어도 준비한 우산으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가려도 앞뒤로 불어대는 비바람은 신발 속을 물로 채우고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걸음마다 질척거린다. 준은 더 거센 바람을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얽히고 묶여 답답한 가슴을 부수고 씻어내고 싶다.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사랑하고도 잡을 수 없음에. 거친 파도를 뚫고 갔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책에 오래 묶인다.


사랑을 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두려운 이유는 준의 사랑 방식이 온몸을 던진다는 데 있다. 깊이의 차이가 있지만 일단 꽂히면 본인의 의지를 넘어 감정에 한없이 빨려든다. 선을 넘어가면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도 제어되지 않는 몸은 결국 본인의 자제력을 잃게 하고, 집착 같은 매달림이 상대를 힘들게 하다 서로 헤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이별의 고통은 회복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세상을 등지고 싶을 만큼의 힘듦이 두렵다. 매번의 연애는 이별의 여운이 끈적이다 못해 늪처럼 허우적거리다 숨이 막혀한다. 쿨하지도 않고, 약조처럼 건조하지도 않다. 지치고 지쳐 갈 뿐이다.


쉽게 몰입되는 성향을 바꿀 수 없기에 사람도 사랑도 포기한 듯 일에만 매달린다. 이제 사랑 안 해. 일만 할 거야. 앞만 보고 내 할 일만 할 거야. 그러나 성실의 대가로 받은 보상이 많아도, 일처리의 높은 성과로 주변의 부러움이 커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만족감은 삶에 부족한 허탈한 무의미가 되어 마음 한구석을 비우고 헛바퀴 겉돌 듯 채워지지 않고 있다.


사랑에 빠져들고 빨려 들어가는 자신이 주체하지 못하는 게 사람 때문인지 사랑인지 구분이 어렵다. 정신없이 일하다 문득 이게 다가 아닌데 싶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일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한. 바닥에 뚫린 외로움에 볕이 들면 기어이 그 햇살에 얼굴을 내밀어 쳐다보다 두 손 모아 가득 빛을 움키려 든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외로운 거다. 외로운 자신을 받아들일 대상을 찾고 싶은 것이다.


준의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의 연애를 결혼으로 이어가지 못한 장애물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맹세하다가도 지금껏 고생한 부모가 떠오르고 그들의 한풀이 같은 기대를 무시할 수 없음이다. 부모 입장에서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을까. 자식의 결혼 여부를 걱정하면서도 막상 자식들의 결혼 과정에서는 늘 성에 차지 않는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반대를 해왔다. 그래놓곤 결혼을 종용하기도 했으니 부모가 원하는 현실적 상대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 며느리나 그런 사위는 없는 거다. 문제는 결혼을 했든 아니든 다른 형제들도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음에도 나중엔 부모의 의견에 동의한다는데 있다. 먼저 결혼한 내가 그러질 못했으니 너라도 잘되라는 의미라며. 결혼 초기 그들의 본가 신고식이 꽤나 힘들고 시달렸으면서도.


낯선 집안의 적응이 쉽지 않아도 언젠가는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여정의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다. 성인이 됐음을 인정하고 각자의 삶을 존중해 주길 바라지만 기대치 높은 가족들과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는 식의 날 선 시험의 벽 앞에서 좌절이 생긴다.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꺾인다. 반대를 등지고 갈등에 시달릴 연인을 감싸 안아도 남겨질 고통의 예측되는 잔상들이, 외면받고 거부될게 뻔한 아집의 후유증이 감당이 안된다. 어쩌면 준 스스로의 자가검열에 미리 선을 그었기에 결과 또한 정해져 있을지도.


준, 알아두게. 손을 뻗어 딸 수 있는 과일을 따듯 그렇게 쉽게 연애 대상을 구하면 안 된다는 선배의 거듭된 말이 별 도움이 안 된다. 마치 사람을 재고 계산하는 듯한, 상품을 고르는 듯한 그 인식이 싫다. 네가 아직 현실을 몰라서 그래. 세상사 모든 게 거래야. 외모든 지위든 경제력이든 좀 괜찮아 보이는 물건 주변에는 날파리가 꼬이지. 인상 좋고 사람 좋아 보인다는 칭찬, 착하고 성실하다며 보내는 미소, 가벼운 선물을 건네기도 하고, 찬란한 미래를 제시하기도 하고, 그러다 미끼를 물었다 싶으면 결정적으로 육탄전을 벌이기도 하지. 조심하고 신중할 일이야. 어쨌든 결혼은 현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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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힘들고 지친 몸이 날카롭고 메말라있다. 수면 시간이 부족하고 해야 할 일들에 마음이 바쁘다. 그런 예민함은 그냥 넘겨도 되는 말들에 울컥 화가 나면서 깊게 내상을 입기도 하고, 별 뜻 없이 건넨 상대의 배려에는 뭉클하게 감정이 빠진다. 맞물려 틈 없이 돌아가는 준의 일상에 염증이 돋는다.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한 이들에게 닥치는 번아웃 탈진은 일탈의 틈새를 찾아 나서다 예상밖의 상황에 쉽게 낚인다. 절반은 그가 원한 바일지도 모른다. 뭔가 새로운 게 필요해.


가볍게 한 번 만나봐요. 인연이면 이어질 거고, 아니면 할 수 없고. 좋은 사람 있어서 소개하는 거예요. 그다음은 알아서 하는 거고. 따로 긴 설명도 없다. 모자를 잘 쓰고 다니고, 건축 쪽 일을 한다는 정도의 정보가 다다. 약속시간에 맞게 도착했는데 그녀는 미리 왔었던가 보다. 두리번거리던 준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가와 준 맞으세요? 커피보다는 배고픈데 식사하러 가시죠.


마른 몸매 까무잡잡한 얼굴. 긴 생머리를 모자 뒤 끈으로 모아 말총처럼 내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얀 남방에 윗단추를 풀었다. 깔끔한 옷차림에 말투가 약간 투박하지만 솔직하다. 준은 그녀의 훅 들어온 의견에 동의한다. 처음 만남이지만 식사 때 이기도 하니 차를 마시는 것보다 밥이 더 현실적이기도 하네.


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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