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그늘 두나

일을 대하는 자세가 그 사람

by 노월

건축자재가 밖에 쌓여있고, 목수와 인부들의 작업이 한창이다. 콘크리트 벽면과 기둥이 노출된 실내 공사장엔 먼지가 뿌옇고, 한쪽에서 하얀 헬맷을 쓰고 턱 끈을 조여맨 명이 보인다. 한 손엔 설계도를 말아 쥐고 다른 손으로 구석을 가리키며 뭔가 설명하는 중이다. 왔어? 잠깐만 기다려. 곧 끝나.


일을 마치자마자 출발했지만 퇴근시간에 붐비고 늦을까 봐 뛰어온 준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다. 약속 장소가 현장에서 가까우니 먼저 여기로 오라는 명의 말이 있었다. 몸을 쓰는 사람들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공사판 한가운데 선 명의 모습은 여자가 아니었다. 준이 잠시 기다리는 사이 헬맷을 벗고 흰 남방에 모자를 쓴 명이 나온다. 바지를 툭 털면서 가까이 오지 마. 먼지가 가득이야. 그 모습이 준의 눈엔 멋있어 보인다.


첫 만남부터 준은 명이 좋았다. 선명한 태도와 깔끔함. 건설업은 여성이 하기 힘들다는, 현장은 막노동이라는, 무식할 거라는 선입관은 명을 만나곤 오판이었음을 안다. 저보다 세 살 윈데 준 씨보단 오빠라 불러도 되죠? 일하면서 대학원 다니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오늘 밥은 제가 살게요. 밥을 산다고? 남자가 먼저 계산을 하는 게 보통 아닌가. 차라면 몰라도 밥을 사준단다. 오늘 처음 봤으면서. 일반적으론 차를 마신 후 여자가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면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과정이 예전 방식이지만 정해진 코스 아니던가. 남녀의 구분에 경제적 부담에서 여자는 여성의 대접을 당연시하던 관행처럼.


준은 기분이 묘했다. 박봉이니 공부가 힘드니 하는 얘기는 구차했다. 가족에 대한 얘기는 소략한다. 자신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세상의 변화 추이, 사람과 일의 관계와 대처 등으로 주제는 생활 전반을 오간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생각의 공유점이 많다는 점에서 관계를 지속할 중요 포인트다.


만날 약속을 하고 연락처를 받으며 돌아오는 길에 준은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거란 다짐이 무뎌짐을 느낀다. 명 같은 사람은 없을 거 같다. 예쁘고 늘씬하고 똘똘하고 분명한 말투. 무엇보다 생에 대한 단단한 자립감이 부러울 정도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준이지만 앞만 보고 살아온 자신이 소실점을 향한 외길만 걸은 것 같이 왜소하고 작게 느낀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다. 공연을 보기로 했는데 장소가 마침 명이 일하는 현장 근처다. 나중 명이 준에게 정장 옷차림을 부탁하려다 말았다는 말을 한다. 부담을 줄까 봐서라고. 명의 차림새는 금방 공사 현장에 있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는 말쑥함이다. 겉옷을 걸친 모습은 방금 집에서 꾸민 듯이 보인다. 그리고 둘은 공연장으로 간다.


준이 발레 공연을 본 건 처음이다. 발레를 직접 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발레라는 예술이 있기는 하고 볼쇼이 발레가 유명하다는 정도였다. 운 좋게 앞 좌석의 표를 예매하고 둘은 앉았다. 나름 공연에 앞서 사전 공부를 했지만, 무대에서 펼쳐진 무희들의 춤사위는 어설픈 지식 위로 날아오른다. 어려서 잠깐 했었는데 너무 힘들어 포기했어. 대신 눈으로나마 대리만족 하는 걸로. 명이 웃으며 발레를 포기해서 아쉽지만 뭐 이렇게라도 풀 수 있어 좋다고 했지만 준은 다시 말을 잃는다. 발레는 그의 삶과 너무 멀어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동네 태권도장이라면 몰라도.


늦은 저녁이다. 가라앉지 않은 흥분과 허기를 채우기엔 밥보다 치맥이 떠오른다. 어때 한 잔? 준의 제안에 명도 동의한다. 준의 눈엔 뿌연 공사 현장의 짙은 먼지가 하얀 헬맷을 피해 비켜 날리고, 명은 때 묻지 않은 한 마리의 흰나비가 되어 무대에서 나풀거리는 모습으로 날아 준 앞에 내려앉았다. 공복의 찬 맥주가 취기를 돋우고 얼굴을 붉힌다.


톱질하고 못질하는 목수가 참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같이 일해보면 목수들이 참 대단하단 걸 느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조물주 같아. 어떻게 그렇게 빈 공간에 꼭 필요한 물건을 딱 맞춰 만들어오는지. 현장에서 급조해야 하는 물건들을 긴 각목과 합판만으로 뚝딱 기막히지. 명의 설명에 준이 맞장구치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명이 더 뛰어나 보인다고. 준의 거듦에 명이 웃는다.


세상의 변화를 잘 따라가진 못해도 기본과 원리에 충실하면서 응용의 가능성을 열어두면 많은 가변의 상황들을 그럭저럭 헤쳐나가지 않을까? 물론 잘하면 좋겠지만, 변수들이 많은 상황에선 근본을 든든히 충실하게 하면 잘못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을까?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 속의 전환기에 어떻게 살 거냐는, 그러니까 쉽지 않은 인생에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 거냐는 명의 질문에 준의 대답이었다. 참, 책 속의 답변이네. 뭐 나쁘진 않지만.


명이 보기에 준은 딱히 화려하거나 뛰어난 기지가 보이지 않지만, 나름의 뚝심과 성실을 바탕으로 착해 보인다. 괜히 거들먹 자랑을 일삼지도 않고, 아는 척하며 잰 체하는 과장된 모습도 없어 보인다. 잘 몰라서 그렇지 나름의 배려심도 있어 보이고 본인의 일에 자부심도 있어 보인다. 약간 가부장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뚝배기 같은 진중함으로 팔락거리지도 않고.


늦은 시각이다. 명의 집을 향해 가는 걸음에 준은 명의 소매를 잡고 주저한다.

나, 오늘 같이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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