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른 불꽃의 흔적은 바닥의 잿먼지
방으로 가는 어두운 복도. 준은 두근거린다. 심장 박동이 귀에까지 울린다. 따라가는 명은 이른 허락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들다 받아들인다. 그의 진실을 믿고 싶다. 키를 돌려 문을 닫으면서 준은 명을 안고 깊은 키스를 한다.
불 꺼진 방 안에 벽면 구석으로 퍼져 들어온 창 밖의 네온 반사광에 노출된 명. 마른 몸매에도 크지 않게 솟아 봉숭한 가슴이 비현실적이다. 어떻게 저런 몸매가 가능할까. 한쪽 다리를 세우고 누운 명에게 다가간 준. 당장 몸의 어디든 살짝만 닿아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준이 명을 누른다. 어슴푸레한 방에서도 명의 몸은 윤기 나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안고스다듬고핥고빨고부비고. 내일은 없고 지금의 이 순간만 있다. 나눈 체온으로 서로 닿은 살의 밀착부가 젖고, 접힌 관절에 습기가 밴다. 가쁜 호흡에 둘은 나란히 천장을 바라본다. 아쉬운 흥분과 미안한 만족.
새벽. 누군가 자는 모습이 아름다우면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했던가. 먼저 일어난 준이 씻고 몸을 닦는데 명이 깨어나 맨몸으로 서있는 준을 본다. 아, 미안. 보려고 본 게 아냐. 아니, 네 앞에선 부끄럽지가 않네. 이상하게.
언뜻 본 황홀함은 놀람과 흥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고, 확인한 그 이상의 자극을 찾는다. 근교를 걷다 인적이 드문 곳에 준은 명의 입술을 찾고, 명은 준의 가슴을 당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서도 더 가까이 밀착해 닿으려는 듯이. 그 간절함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남아있다. 심각하면 부족하다고 했던가. 갈증은 아무리 채워도 단맛으론 가시질 않는다. 더 목이 타고 마른다. 애욕은 적셔서 없애는 게 아니라 식혀서 가라앉아야 한다. 차분한 여유로. 알아도 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사람 속을 알아내려는 시도들이 여러 가지겠지만, 속내를 떠보려 취하도록 술을 같이 마셔 보고, 대범한지 여부를 보기 위해 도박을 해보고, 인내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산행을 해보라는 말이 있었던가. 준은 명에게 산행을 제안한다. 최근 운동을 안 해서 힘들 것 같다는 명에게 준은 힘들면 업고라도 와야지란다. 말이 고맙네.
계곡을 지나 큰 나무 밑 너른 바위에 등 대고 누워 본 지 얼마던가. 나뭇잎이 가려준 그늘 사이로 하늘이 반짝인다. 간만의 산행이 힘들었던지 준이 입은 상의의 회색티가 등에 진한 무늬다. 산행은 오름보다 내려옴이 더 어렵다. 산행의 실족사고는 하산에서 주로 일어나지 않던가. 하산하는 길에 무릎이 풀려 제대로 걷지 못한 건 준이다. 내보다 낫네.
주말 수영장. 수영할 줄 알아? 어려서 몇 번 해보긴 했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명을 따라 풀장에 들어온 준은 자전거처럼 몸의 기억을 믿었지만 몸은 가라앉는다. 물에 띄우지 못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준은 거푸거푸 개헤엄이다. 명을 뒤따라 열심히지만 물만 먹는다. 먼저 도착한 명의 눈에 그래도 헉헉거리며 끝까지 안간힘으로 도착한 준을 본다. 믿을 만한 성실함이 인정되고, 레인 끝에 도착해 가쁜 숨을 쉬며 선 준의 허리를 명이 허벅지로 감싸 안다가 주변의 시선에 놀라 배영으로 물러난다.
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은 빈번하게 정말 사랑하는지 재차 확인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불신은 아니지만 확신에 대한 자신이 없기도 하다. 촉박한 약속 시간. 준은 마음이 급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일이 겹쳐 늦었다. 만나기로 한 지하철 역에 지각 도착으로 명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혹 건너편이었는지 확인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린다. 없다. 또 다른 지하철의 도착과 출발. 사람들이 몰렸다 쏵 빠져나간 역에 명이 없다. 준은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듯 실망하여 고개를 숙인다.
명을 찾아 헤매는 준을 숨어 지켜보던 명이 등 뒤에 나타난다. 확인하고 싶었어. 저기 기둥 뒤에 있었는데 못 봤나 안보였나? 눈이 글썽이고 처져 서있는 준을 명이 안는다. 왜 그래? 뭘 알고 싶은 건데?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그녀가 묻는다. 다른 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쌈에 싼 고기를 씹어 삼키고 소주를 반 잔 넘기며 준은 눈을 내리깐 채 말한다. 뭐가 먹고 싶냐고? 응! 너. 너야. 너면 돼. 불판에 고기를 더 얹으며 명의 대답이 늦다. 그-래-. 고기를 구워 가위로 자른다. 빈 잔을 채우고 따라준다. 근데 오빤 내가 좋은 거야 나랑 하는 게 좋은 거야? 술이 넘어가고 준은 침을 삼킨다. 그게 구분이 돼?
몸에 새겨진 기억은 오래간다. 어쩌면 날카로운 고통보다 부드럽게 미끈거리던 느낌과 온기가 더 깊게 몸에 각인된다. 침의 흔적은 사라져도 꼭 안아 맞닿은 살의 부드러움과 율동은 떠올릴 때마다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중 아주 나중에 이별의 시간이 오래되고, 헤어진 지 한 참을 지나도. 시간의 흐름으론 탈색되지 않는 감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