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그늘 네나

사랑해서 이별한다는

by 노월

천륜과 인륜이라는 게 인간이 만든 도덕적 윤리 규범일 텐데 그런 사회적 통념이라는 상식이 우리를 옭아맨다. 개념화된 편리하고 간편한 규정들이 불편하다. 가족은 화목해야 한다는 말이 가족이니까 참으라는 강요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고? 그 사랑이 그 사랑이던가? 타인으로 시선이 옮겨지고 시간이 지나가는 거다.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 갈까? 사귀는 사람 있다고 했더니 아빠가 궁금하다고 그냥 집에 한 번 들러라고 하시네. 명의 요청에 준은 머뭇거린다. 가볍게 한 끼 먹자는 말이지만 명의 부모를 만나는 자리가 부담이다. 아직 때가 아닌 거 같아. 어른들을 만날 마음의 준비도 안 됐고. 편하게 집에서 밥 한 끼 먹자고, 엄마도 집밥을 해주고 싶다고 하시네. 울 엄마 요리 잘하셔.


흠, 그래 부모님은 평안하시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 형, 누나가 있습니다. 어이쿠 그랬구나, 그래.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겠구나. 그래도 듬직한 아들이 이렇게 잘 커서 뿌듯하시겠어. 준의 말투나 행동거지가 의젓하게 무게가 있고 목소리에 책임감이 있다. 명아, 저기 술 좀 꺼내 오너라. 아빠 오래간만에 술 하시네요. 네가 어떤 사람과 사귀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봤으니 한 잔 해도 좋을 듯하네. 자, 준 자네도 한 잔 하지.


명은 준의 눈치를 본다. 그래도 아빤 은근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야. 오빤 어땠어? 아버님 인자해 보이시더라. 좋은 부모님 같아. 한 번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첫 대면은 늘 어렵다. 명의 아빠가 술을 한 잔 한다는 의미를 명은 너무 잘 안다. 명이 준의 어깨에 매달리며 마치 합격선을 넘은 듯이 밝다. 그녀의 가슴이 준에 닿는다.


명의 마음 같아선 빨리 준의 집에도 가서 내친김에 결정을 받아올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준의 마음 한구석은 어둡다. 집안 분위기가 걱정이다. 유독 까다롭게 따지는 누나를 앞세운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힘들고 홀로 자식을 키운 엄마 입장에선 다 큰 자식들을 보며 보람을 찾고 싶은 건지, 아님 자식 덕을 보려는 건지. 늘 결혼 직전까지 며느리든 사위든 마음에 들지 않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형제들은 식이 끝날 때까지 엄마 비위를 맞추질 않았나. 그런 그들도 보상심리가 작동했을까. 너라도 엄마 맘에 드는 사람 데려오면 좋지.


준과 명을 두고 집안 식구들이 둘러앉는다. 준의 가족들은 새 식구가 늘어날 들뜸이나 호기심이 아닌 조사와 분석이다. 아버진 뭐 하시냐, 어디서 일하시냐, 직책은, 형제는, 네 대학 전공은, 직업은? 질문에 호의가 없다. 준이 눈치를 줘도 알고 싶은 건 물어봐야 할 것 아니냐며 찔러 따끔하게 움츠릴 질문들이 멈추질 않는다. 건축 디자이너라고 말했지만 막일이라는 말이잖아. 준이 발끈하며 소리친다. 그만하라고.


너, 쟤를 만나고 변했어. 엄마한테 하는 말투가 그게 뭐냐. 착하던 놈이 이렇게 대들고. 어떻게 저런 걸. 너, 잘 알아둬. 결혼은 현실이야. 누나의 말에 준은 그건 현실적인 게 아니라 속물적인 거지. 어떻게 모든 걸 폄하하고 멋대로 판단하는 거야. 얼마나 봤다고 그러는 거야?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앞에 두고 가족이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란 게. 준은 명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온다.


여전하다. 변한 게 없다. 부모의 결핍을 자식들에게서 채우려는 강박처럼, 형제들은 그들의 불만을 동생에게서 보상받고 싶은 것처럼, 개천용 하나 만들어 같이 등천에 편승하려는 것처럼, 준은 불편하고 부담이다. 그게 이렇게 드러난 건가. 그래도 그래도 하며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로 나타나고 준은 바뀌지 않는 한계를 확인한다.


둘은 말이 없다. 집안으로 들임이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애초 기세를 눌러 제압하려는 분위기다. 맞춰 숙이고 적응하려는 시도부터 무리다. 고부 갈등은 뻔하고 시누의 질투나 형의 몰이해 등이 차단의 벽으로 가로막는다. 준의 가슴은 답답함을 넘어 멍먹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뜬 눈에서 눈물이 그대로 쏟아진다. 자신에게도 명에게도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민망해서. 도대체 가족이 뭔지?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 마음에 들게 어떻게 하냐고? 누굴 위해?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하는 게 행복 아냐?


명과의 관계를 더 깊게 이어가는 건 명에겐 치명적인 불행이 될 게 뻔하다. 속에 가득 찰 울화병으로 웅크려 한 마디도 못하고 시들어가리라. 준은 가족의 명에 대한 비난보다 그 비난으로 마음 고생할 명에 더는 상처를 만들어선 안된다고 마음을 굳힌다.


미안, 사랑으로 넘어가자고 헤쳐나가자고 달래는 말을 하기엔 현실이 너무 가혹할 것 같아. 모질게 가족관계를 끊고 앞으로 안 볼 마음을 내야 하는데 자신이 없어. 준이 명의 손을 잡으려 해도 명은 저만치 떨어져 걷는다. 혼자 있고 싶다고.


명을 못 본 지 몇 개월이다. 준은 명을 잊으려 한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이 뭔지 그놈의 가족이 뭔지. 누가 정의를 내린단 말인가. 한 번 볼까? 명의 문자. 준은 다시 두근거린다. 이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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