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그늘 섯나

선택하지 않은 선택의 잘못

by 노월

사실 그게 건너뛰었어. 심각한 일을 명은 담담하게 얘기하지만 떨리고 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 말을 하고 싶었어. 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속이 쎄하게 아린다. 아, 그랬구나. 미안해라는 말이 기어들어간다. 명은 수척해졌고 말에 힘이 안 들어가고 자신 없어하고 얼굴에 윤기가 없다. 준의 입으로 그 어떤 무엇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죄인이 따로 없다.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 듯 힘들었겠구나.


오빠 가족이니 잘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어. 다시 한번 더 해보자고. 준은 말없이 무겁게 고개를 젓는다. 그런다고 쉽게 바뀌지 않아. 너만 고생이야. 나도 쉽지 않아 물러서는데 어떻게 다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약간의 남은 미련마저 뚝 떨어져 나어. 그럼 오빤 미리 알았던 거고? 내가 막내고 마지막 혼사가 될 수 있으니 어쩌면 하는 기대로 아니길 바랐는데 아니야. 설마는 결국 역시였어.


눈앞에 보이는 절벽 낭떠러지를 향해 달릴 순 없다. 준 혼자라면 얼마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명에게 얼마나 멍이 될지, 그걸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그 길을 명과 같이 가자고 할 순 없다.


못나고 비겁하다. 그냥 몰아붙여 뭐가 되든 따지지 말고 무식하게 뚫고 나가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든 게 무기력하게 밀려든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불가항력이라고 말하기엔 초라하고 비참하고 쪼잔해진다.


둘이서 행복하게 살아볼까도 생각했었다. 주변의 축하나 환영 없어도 둘만 잘 살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축복 없는 결혼을 명에게 말할 용기가 없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해도 변치 않을 사람들은 변치 않을 거다. 그렇게 준은 물러선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그럼 난 뭐야. 내게 남은 건 뭐냐고. 명은 준을 탓할 생각이 없으면서도 준에게 원망의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그나마 좋네.


입맛은 없는데 허기가 진다. 대충의 가벼운 끼니. 비 온 뒤의 바람이 차가운데 볕은 따갑다. 몸이 나른해진다. 명은 준에게 기운이 없다며 좀 쉬어가자고 한다. 한숨 자고 나면 기운이 날 것 같다며.


살짝 코 골던 명이 깼는지 옆에 누운 준을 안는다. 긴 입맞춤으로 서로를 탐하는 손길이 오간다. 명의 긴 머리칼이 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덮는다. 누군가의 머리칼이 닿아 이어지는 거리의 흔들리는 간격. 명의 잘록한 허리를 잡고 누운 준의 얼굴에 명의 눈물이 떨어진다. 마지막 안녕이야. 기억해 줘.


준의 몸에 남은 명과의 느낌은 문신처럼 새겨진다.

새벽에 깬 잠이 그리움으로 뒤척이고, 허전한 웅크림과 몸부림으로 남는다.


옷이 몸에 감겨 질퍽거리고 몸을 휘감아 몰아치던 비바람이 지나간 하늘에 찢긴 먹구름 조각이 흩어져있다. 노을 진 서쪽 하늘의 구름에 퍼진 붉은 그늘이 길다. 힘 빠진 햇살은 구름을 뚫지 못하고 적색띠 뒤로 회색 덩이를 길게 남긴다. 오래 전의 잊힌 사랑보다 더 독했다. 아마 다른 사람 만나는 일은 남은 내 생에 없을 거야. 준의 등 뒤로 바람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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