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 여행

블라디보스토크

by 노월

러시아에 간다고? 지금 전쟁 중인 나라에? 왜 가는데? 거긴 인터넷도 안된다던데, 위험하지 않아? 가서 뭘 하려고? 말도 안 통하고 공짜로 가라고 해도 싫을 거 같은데.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여행을 찾다 이거다 싶은 여행사 상품을 봤다. 배를 타고 하루 걸려 러시아 도착. 하루 현지 투어 후 다시 하루 꼬박 배 타고 한국으로. 러시아 현지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현지의 일정은 하루동안이라 그냥 훑어 지나는 수준의 여행이다. 그런데 나는 끌렸다. 나의 목적은 밤배를 타고 밤바다를 마음껏 보는 것이다. 그것 만으로 설레고 신났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스무 시간 넘게 배를 타고 간다고? 난 자신 없다. 가려거든 혼자 가. 배 안에 있는 숙소가 이층 침대라고? 창문도 없는 방에서 그것도 6인실에서? 난 힘들 거 같아. 속으로 잘됐다 싶다. 쇼핑을 하거나 우아하고 럭셔리한 여행을 꿈꾸는 이에겐 왜 그런 고생스러운 여행을 하려는지 이해 못 할 수도 있겠네. 그래 그럼 혼자라도 갔다 올게.


러시아는 아직 겨울인데 적응되겠어? 영하 이십 도의 날씨를 겪어보기나 했어? 또다시 여행을 말리고 가지 말라는 딴지다. 내복 껴입고 파카 입으면 돼.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일 텐데 무슨 일이 있을까. 가지 못하게 할 명분이야 얼마든 만들 수 있다. 일일이 대응하는 동안 더 마음을 굳힐 수도 있겠지만 의미 없는 입씨름이다. 매듭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예매를 했다. 취소를 하면 손해가 발생한다고 돌이킬 수 없다고 이제 결정을 했다고. 일이 진행되려면 물러설 수 없는 단초를 만들어야 한다. 일단 저질러야 일이 된다. 의지와 의도가 꺾이지 않으려면. 외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바다를 보러 그 멀리까지 간다고? 여기서도 얼마든지 바다를 볼 수 있는데 굳이 외국까지 바다를 보러 가느냐는 노모의 걱정에 배가 커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말로 달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를 보는 게 다르다고 말하려다 입을 닫는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냐고 할까 봐. 그래서 가보려고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 그래도 추위에 고생일까 싶어 방한모까지 얹었다. 마음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바람 막을 건물 하나 없이 사방 트인 망망대해의 늦겨울 밤바다 바닷바람이 더 마음에 걸렸다. 바다를 보는 게 목적이긴 한데 배에서 바람 쐬다 추우면 숙소로 들어가면 되지 뭐.


새벽에 일어나 속초로 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평소라면 대략적인 시간에 맞춰 움직이면 될 일이지만 연휴가 낀 속초행은 고속도로의 정체로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을 넘겨 항구에 도착했다. 무사히 승선을 했지만, 여유 있게 도착하면 속초 중앙시장에 들러 점심을 먹으려는 계획은 건너뛰었다. 입항수속에 바빠 배가 고팠다. 크루즈형 페리. 선내 매점에 들러 컵라면과 햄버거를 데웠다.


이층 침대가 3개 있는 6인실. 원래 내 자리는 위층이지만 침대의 사다리를 오르내리기 불편해 아래층에 배낭을 일단 던졌다. 다행히 숙소의 인원이 4인이다. 두 칸이 비어서 눈치 볼 일 없이 자리를 찜했다. 한편에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다. 배가 떠나고, 육지는 시위에서 멀리 가물거리다 물속으로 잠긴다. 승객이 많아도 혼자 여행은 대화를 나눌 동행이 없다. 이 모든 경관을 나눔 없이 홀로 눈에 마음에 담아 두면 더 오래 찍히는 것 같다. 이렇게 혼자 여행이 얼마만인가. 폰도 안되니 더욱 홀가분하다. 고립 같지만 자유롭다.


흔들리는 배위에서의 첫 끼. 예상치 않게 맛있는 뷔페. 뱃멀미를 걱정할 정도의 흔들림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 구름이 짙고 별은 보이지 않는다. 달도 없다. 우리 영해를 넘어 이제 공해公海에 있다. 멀리 수평선쯤에 몇 척은 있음 직한 고기잡이 배가 없는지 집어등 불빛이 없다. 바다가 텅 빈 것 같다. 페리에서 나온 불빛이 배가 가른 파도를 하얗게 비출 뿐 공해空海는 하늘과 한 색이다. 사방 어둠에 싸여 떠있는 배 위에 바람이 차다. 엔진 소리와 파도 소리만 있다.


멍하니 바다를 한 참 바라본다. 깊은 바다색은 화산 유리체인 흑요석 같다. 투명하게 검푸른 깊음. 난간에 서서 팔을 뻗어 손으로 바람을 잡는다. 이렇게 넓은 바다를 보며 온 사방이 물이란 게 신기하다. 물이 이렇게나 많은지, 이 물이 어디서 와서 이렇게 고였을까. 이 넓은 바다에 배가 철판이 떠 있고, 나는 그 위에 서있다. 바람이 시리다. 뻐등하게 차가워진 맨손을 주머니에 넣었더니 동전이 잡힌다.


만지작거리던 동전 하나를 바닷속에 던진다. 불빛에 잠시 반사되더니 떨어지는 소리도 파문 흔적도 없이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이 넓은 바다에 동전 하나로는 아무 일 없다. 가라앉은 곳도 모르고 다시 찾을 수도 없겠지. 찾을 일도 없지만. 분명 해저 어딘가 동전이 있겠지만 그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혹 저 어둡고 시커먼 바다에 나를 던져도 그렇지 않을까. 물론 여행사 입장에선 난리겠지만.


감춘 게 아니라 깊어서 보이지 않는 바다

거리낌 없이 모두 내보여도 볼 수 없는 심연

마음껏 드러내도 너무 당연해서 무관심한 속내

숨기며 덮은 안일한 위안보다 드러낸 수치羞恥가 자유롭다


자리에 누웠는데 바닥이 움직인다. 슬쩍 잠이 들었다 흔들림에 깬다. 아, 바다 위에 누웠구나. 파고가 높은지 어깨 쪽으로 쏠리며 눌리던 무게가 허리 쪽으로 당겨지는 힘이 반복된다. 저항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누워 흔들림을 느끼는 것이다. 흐름을 따라 맡긴다. 시냇물에 떠있는 낙엽처럼 몸에 힘을 빼고 나도 같이 파도를 타고 넘어 꿈으로 간다.


새벽에 잠을 깬다. 일출이 은근 기대된다.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 방해 않게 조용히 밖을 나간다. 바람이 차다. 갑판 쪽으로 나가 주변을 담아도 어떤 표식이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변은 그냥 물이고 그 바다 위에 떠있는 배에 서있고 멀리엔 수평선만 보인다. 하늘엔 구름이 끼어 바다에서 솟는 해를 볼 수 없을 거 같다. 서서히 하늘의 어둠은 옅어져도 어디가 동쪽인지 대충이다. 일출을 기대한 다른 승객들이 하나둘 모이다 병아리 물 마시듯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멀리 시선을 던진다.


아침 먹고 다시 침실. 누워 위층 침대의 바닥을 본다. 갇혀있는 모양의 창 없는 방이지만 갑갑하지 않고 나름 쾌적하다. 창문이 있다 해도 열 수 없는 붙박이 창이요 동그란 창으로 밖을 본대도 뿌연 유리창으로 그저 파도와 수평선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맞은 편의 마산 아저씨도 혼자 왔노라며 나는 쵸코렛을 그는 귤을 건넨다. 퇴직 후 남은 인생에 두루 세상을 구경하며 여행을 다니는 게 제일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여행을 위해 술담배 끊고, 등산을 하고, 자전거 타고, 질병 없이 다리에 힘이 허락하는 한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고.


움직이지 않는 대지에 발 디디고 생활한 사람들이 바닥이 움직이는 곳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뱃멀미를 한다면, 배를 오래 타고 다닌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육지에서 오히려 육지 멀미를 한다고. 고작만 하루를 배에서 보냈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리자 약간의 어지럼이 인다. 버스로 이동을 시작하고 시내 관광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 혁명광장을 시작으로 정교회 성당과 신한촌 등을 거쳐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열차의 시발점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돌아간다. 가이드를 따라 졸졸 따라가는 패키지 관광은 어미를 쫓아 줄지어 가는 오리 새끼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가 인상적이다. 십자가 하단의 빗장도 이색적이지만, 교회당 내부엔 기도를 위한 의자가 없어 신도나 방문객은 서서 예배를 보고, 건물 주변엔 성물 같은 조각보다는 성화 위주로 꾸며져 있고, 성가를 부를 때 악기가 없고 연주나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만으로도 몸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자유시간에 간 아르바트거리의 해상공원가 바다 한쪽은 동해凍海가 펼쳐져 가까운 바다 위를 걸어본다. 블라디보스토크도 일부만 부동항인가. 공원의 얼음 위로 비둘기가 먹이를 찾아 빨간 발바닥으로 걷는다. 규제를 벗은 자유가 아직 낯설고, 러시아 특유의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은 날씨에 얼어서라기보다 자본의 천박에 대한 대응 같다.


다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다. 새벽 호텔 밖을 걷다 귀가 떨어져 나갈 추위에 놀라 얼른 방으로 왔었다. 아무리 추워도 바람만 안 불면 덜 춥다는 말만 듣고 나갔다 혼났다.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는 맞고 어떤 점에선 맞지 않다. 야간 밤배로 돌아오는 하늘은 아직도 흐리고 도착한 속초엔 눈이 내린다. 집에는 영상의 날씨. 영하 15도에서 영상 8도까지 잠시 거리에 23도 온도차를 지나왔다.


밤배를 타고 밤바다를 밤새 만끽한 늦겨울의 외유는 손 끝에 스치는 그 깊은 색의 아득함이 되어 파도를 넘는다. 혼자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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