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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Dec 11. 2022

삼삼회

어떻게 친할까?

사회에 진출하고, 결혼하고, 직장생활들을 하면서 각자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면, 옛 친구들이나 친한 이들과의 연락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찌 연락이 통해서 보기도 하고, 또는 본격적으로 동기회 모임이나 동호회 모임을 갖기도 한다.


동호회처럼 같은 취미나 비슷한 동기를 두고 하는 모임도 있고, 학연 지연에 기반한 모임도 있고, 업무나 사업을 하면서 만나는 모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모임이든 정작 본인의 사회성이나 사교성이 어느 정도 받침이 되어야 주목을 받고 잘 융화해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보인다고 말한다는 것은 곧 나는 별로 그런 성격이 아니다는 말이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스타일도 아니고 낯도 약간 가리는 편이라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 정도의 지인이나 주변인들이 대부분이다. 알고는 있는데 딱히 속속들이 잘 알지는 않는 정도의, 친하다고 거리낌 없이 말 하기엔 뭔가 부족한 정도의 친구들 뿐이었다.


어느 날, 고3 때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동기가 아버님과 같이 한의원에 왔다. 그와의 관계도 고교 졸업과 동시에 서로 연락이 끊겼는데 최근 어찌 연락이 닿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관계였다. 그러다 부친의 어깨 통증이 잘 낫지 않고 걱정이 되어 내게 진료차 왔던 것이다. 아버님은 어깨관절의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불편해하셨다. 여러 병원을 전전해도 잘 낫지 않는다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님은 젊어서 육체적 노동을 많이 하신 탓에 근육이 굳어있었다. 그때마다 진통제로 견디며 지내다, 이젠 진통제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정형외과에서의 치료로도 크게 호전이 없었다. 한 달여 치료를 하면서 통증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어깨관절의 가동범위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한두 달 더 치료를 했지만 견갑골 주변의 근육 경직이 심해서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임이 둔한 상태에서는 통증이 다시 심해질 수 있다.


그나마 통증으로 인한 수면 방해는 많이 감소했다. 아파서 잘 수 없는 정도는 아니시란다. 어깨관절의 움직임이 약간씩의 완화를 보였지만 더뎠다. 그쯤에, 나는 내가 놓치거나 간과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결정적으로 맥이 약했다. 어깨관절의 정밀검사를 권했다. 혹 인대가 끊어졌는지 관절 부위의 다른 질환이 없는지 알아야 했다. 친구에게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얘기하면서 생각보다 호전이 느린 게 다른 원인은 없는지 검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그렇게 더딘 게 정상 아닌가 하고 되려 내게 물었지만, 그래도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친구는 이왕 검사하는 김에 단순 어깨관절의 체크뿐만 아니라 종합검사를 해보자고 권하는 병원 측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였다. 연세도 있으시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나.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막상 궁금했던 어깨관절의 상태가 문제가 아니었다. 더 심각한 질환이 발견되었다. 당황스럽게도 림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별안간 정형외과적 질환에서 혈액종양으로 초점이 바뀌면서 아버님은 졸지에 암환자로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년여 항암치료를 받고, 이젠 항암치료는 끝났다는 말을 듣고 나서 한 달 후, 아버님은 감기 기운이 있어 잠시 입원한다는 게 갑자기 폐렴으로 병이 진행되더니 그만 유명을 달리하셨다. 내게 그 소식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날보다 더 충격이었다. 숱한 만감이 교차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소주잔을 채우며 내가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그 친구는 아니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그의 감정이고,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냥 어깨가 아프기만 한 상황이 더 좋았을 것이고, 그저 아버님의 치료 진행 상황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끝을 내야 했다. 아픈 곳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렇게 달래며 지내도 됐을 일들이다. 물론 나중에 암이 발견되거나 더 악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겨우 1년을 넘기는 정도에서 끝이 나고, 그것도 항암 치료로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까웠다. 힘들게 보낸 그 시간보다는 아버님이 훨씬 더 오래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나는 검사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부추긴?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이상하게 그와 연결된 이후 우린 몇 차례 더 만남을 가졌다. 그 또한 나만큼 친구들의 눈에 잘 띄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의 살아온 얘기를 듣다가 참 괜찮은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그렇게 공부 안 하고 놀았으니 대기업에 취직한다는 생각은 진작에 접고, 중소기업에 들어갔다'란 말이 내겐 참 신선하게 생각됐다. 아무리 먹고 놀았어도 그의 전공은 공부하기 쉽지 않은 기계공학과였다. 그는 그 정도에서 그게 본인에게 합당하다는 듯 작은 기업에 취직했다. 겸손이든 현실 자각이든 좋았다. 그보다 못한 놈들도 대기업을 넘보고 또 실제 취직도 가능했던 호황기의 시절이었으니.


야, 이놈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기는 그가 처음이다. 물론 그렇다고 애착이나 연민은 당연 아니다. 오래 같이 잘 지내고 교류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는 그가 처음이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다른 아웃사이드로 생활하는 두 명을 더 영입? 하여 서로 시간을 맞춰 만났다.


넷이 같이 만남이 지속되다 보니 밥값이며 술값 계산을 할 때마다 실 겡이다. 여긴 우리 동네니가 내가 낸다, 웃기자 마라 이 번엔 내가 낸다. 그래서 이왕 그렇다면 회비를 모으자고 의견을 모았고, 월 2만 원씩 내기로 했다. 현실적으로 자주 모일 수도 없고, 그 정도의 금액이면 적당하리라. 그리고 3학년 3반이었으니 내가 정했다. '삼삼회'라고.


그렇게 술만 먹기에는 다른 모임에서도 해볼만큼 다 해봤을 테다. 그래서 우린 여행을 계획했다. 처음엔 당일치기를 몇 차례 해봤다. 별 무리 없이 다들 만족하기에 다음을 계획했다. 1박 2일로. 그런데 그 친구의 기획력이 놀라웠다. 시간에 따른 동선을 짜고, 주요 포인트를 정하고, 숙소와 먹거리를 예약하는 등 거의 여행 가이드 수준으로 준비를 했다. 가끔은 사전 답사를 하기도 한다는 말에 난 기가 막혔다. 가끔 플랜 B가 있기도 했다. 무슨 그런데까지 신경 쓰냐고,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도 좋다고 해도 그는 본인이 좋아서 그런다고, 이견이 없으면 자기가 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하쟌다. 그래 좋다, 네가 좋다면.


코로나로 못 만났더니 이젠 회비도 두둑하다. 많다. 2백만 원 정도 쌓였다. 내년 백록담을 가기로 했다. 그 사전모임 겸 송년회를 가진다. 한 명은 대기업 차장에서 부장 승진 누락을 몇 년하다 권고사직으로 퇴직해서 협력업체에 다니고 있고, 한 명은 학생들 보기엔 늙어 인기 없는 나이 든 학원 원장으로, 한 명은 중소기업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했다. 우린 이렇게 만나 논다. 나도 뭐 말이 좋아 한의원장이지 까칠한 성격이라 그저 평범하다. 다들 고만고만하다. 목욕탕에서 같이 발가벗고, 같이 자기도 하고, 속내를 마음껏 드러내는 친구. 그래도 좋다. 행복.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은 미래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행복은 현재의 진행 상태의 형용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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