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home(김윤아) #너에겐 가족이 있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엄마 뱃속 캄캄한 세상에서
같은 모태의 탯줄로 허기를 달래며
'존재'가 되고 싶었던 우리
저 멀리 어딘가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자기(自己)를 만들었을 때처럼,
저 멀리 각자의 시간에서 우리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자아(自我)를 찾아 헤매던 우리
'무언의 존재'가 되고 싶어
형용사를, 명사를 갖고 싶어
고독한 시간을 홀로 삼켜가면서도
때로 방향이 달라지고
길을 찾고 싶어
외로운 시간을 홀로 흘러가면서도
떠나오고 돌아오고 내어주고 보태어지며
이곳까지 무사히 잘 왔다는
잘 가고 있다는
안도감
가족 안에서
세상과 평행을 이루며
오늘도 흘러간다
1997년 10월. 우리는 아기의 세상이 되었고, 우리도 아기가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만남과 동시에 일순간에 엮여버렸으므로 말 그대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녀석은 아기인데도 완전한 존재처럼 머리털이 있었다. 유난히 큰 동공을 가진 너는 나를, 나는 너를 관찰했다. 노인 같은 표정으로 노인 같은 주름을 지닌 너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기를 안을 때는 머리에 숨구멍이 있으니 조심하라 했다. 갓난쟁이에게만 있다는 숨구멍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먼 세계와 아직 연결되어 있는 통로가 아닐까? 숨구멍이 사라지면 너는 알고 있는 전부를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되는 걸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던, 우리에게 없던 아기는 어느 날 덩그러니 나타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숭고한 그것을 우리는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비로소 진정한 ‘가족’이 형성된 것만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다섯이었던 것처럼, 가족은 본디 다섯이어야만 하는 것처럼.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엄마와 아빠가 만났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에 엄마와 아빠가 그들의 엄마 뱃속에서 웅크려있을 때부터 ‘우리’는 정해져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운명공동체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기를 중심으로 삼삼오오 친인척까지 다 모일 때면 새삼 소속감이 두터워진 기분이었다. 아기 특유의 고소한 냄새는 토 냄새라는 것조차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너의 세상을 만나서 나의 세상이 더 커졌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자기(自己)를 만들었을 때처럼, 저 멀리 군대에서 우리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자아(自我)를 찾고 있던 너. 신부대기실에 군복을 입은 채 쭈뼛거리며 멋쩍게 들어오던 너. 등에 짊어진 무거운 배낭이 마치 삶의 무게를 진 것만 같아 마음이 미어졌더랬다. 이제는 가족이 대신 들어주기도 내려주기도 쉽지 않은 온전히 네가 책임져야 할 네 인생, 네 몫. 가족은 그렇게 서로의 무게를 묵묵히 바라만 보아야 할 때도 있었다. 군인이 되어, 직장인이 되어,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세상을 키워나가고 있다는 게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길 잃지 않고 이곳까지 무사히 잘 왔다는, 잘 가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엄마 뱃속 캄캄한 세상에서 같은 모태의 탯줄로 허기를 달래며 ‘존재’가 되고 싶었던 우리는 무섭고 외로웠을 시간을 가족이 있어 버텨냈구나. 세상에 태어나서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또다시 고독한 시간을 견디어야 하는데 가족이 있어 외롭지 않구나. 가족이란 떠나고 돌아오고 내어주고 보태어지며 세상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었다.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함께 켜켜이 쌓아온 시간만큼 늙어가는 모든 시간을 존중하며 살아가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막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