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랑 #타인을 위한 삶
그가 쓴 시는 낙서장이 되었다
막무가내 그림들이 그의 시를 덮었다
그의 젊음이 첫사랑이 시처럼 옅어졌다
그는 자식이 아까웠다
열아홉이 되도록 손톱을 깎아주고 이불을 깔아주며
시집가서도 아빠한테 오너라 했다
외로웠던 어린 날을 보상하듯 사랑으로 채웠다
그는 운전을 했다
그의 차는 늘 누군가의 발이 되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학교 앞에서, 주말에는 시험장, 퇴직해서는 문화센터
그의 차는 늘 데려다주고 기다리느라 꽉 찼다 텅 비었다 했다
그는 아이를 돌봤다
어린 발이 산을 넘어 다니며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힘줄 돋은 손으로 세 남매를 기르고 돌봤다
백발이 되어서는 매일 손주의 하원을 돌본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돌보느라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는 매일 술을 먹었다
그의 술은 늘 기분이 좋았고 정이 넘쳤다
과묵한 그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어린 날의 서러움을, 엄마의 그리움을 마실 때도 있었다
그는 세끼가 중요했다
그의 첫마디는 “밥 먹었냐”였다
그는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을 기대하고 고마워했다
더 이상 굶지 않게 되었는데 한 끼 놓치는 게 어린 날처럼 서러웠다
그는 엄마가 둘이었다
작은 아기는 가냘픈 엄마의 품에 몇 번을 안겼을까
서툰 소년은 다른 곳을 향하는 엄마의 시선에 몇 번을 투정 부렸을까
그는 엄마 대신 자식을 끌어안고 손주의 온갖 투정을 받았다
비로소 그는
섧지 않았다
아빠에게는 어머니가 두 명이다. 친어머니는 아빠가 아기일 때 동생인 작은 아빠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아빠는 예민한 아기였는데 아빠의 할머니는 아빠 때문에 엄마가 그리 되셨다며 늘 아빠를 원망했다고 한다. 새엄마는 동생 셋을 더 낳았다. 둘째인 아빠는 어디서도 사랑받을 곳이 없었다. 이마저 큰엄마에게 들었다. 그 긴 터널을 아빠는 어떻게 지나온 걸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직, 겨우, 아기가, 아이가. 아빠는 큰엄마가 옛이야기를 할 때면 늘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는데 나는 감은 눈 안 깊이 뜨거운 아빠의 눈물이 느껴져, 아기처럼 작아지는 아빠의 어깨를 꽉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위로에 아빠가 정말 작아질까 봐 정말 슬퍼질까 봐 늘 바라만 봐야 했다.
아빠가 국민학교 때, 이발소를 하시던 할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잘 살던 집과 재산이 다 넘어가고 가세가 기울었단다. 큰엄마는 내가 알지 못하는 건물과 누구네 집 얘기를 하며 옛날에 거기도 우리 땅, 저기도 우리 땅이었어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아빠는 본가가 아닌 산속 구포집에서 살았다 했는데 그 이후 부터였던 걸까? 학교까지 산을 넘어 다녀야 하는데 다듬어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숲길을 넘나니던 어느 날 학교를 그만뒀다 했다. 그리고는 동생들을 돌봤단다. 이건 고모에게 들었다. 아빠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것일까? 사람도, 배움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도, 시도 좋아하는 사람이. 손주를 애지중지 하는 우리 아빠를 보며 "너희 아빠는 어려서부터 애들을 좋아했어~"라는 말이 달갑지 않다. 지금도 친구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신혼여행도 친구부부랑 같이 갔다) 어릴 때라고 친구보다 동생들을 더 좋아했을까. 아무도 모를 그의 이야기.
아빠는 해군이었다. 내가 스무살 때 같이 낚싯배를 탄 적이 있는데 그 배에서 아빠랑 나만 심하게 뱃멀미를 했다. 우리 둘은 토를 하고 엎어져 있다, 토를 하고 누워있다, 토를 하고 잠들었다. 새하얀 해군복을 입은 아빠가 커다란 배를 등지고 멋진 포즈로 서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아니 아빠는 해군이었는데 뱃멀미를 해?" 아빠는 머쓱하게 웃으며 "헤헤 아빠 운전병이라 배 안 탔어~" 한다. 아빠의 사진 속 멋짐에 20년 속은 기분. 아니 아빠는 속인 적이 없구나. 그 사진에서조차 아빠는 배를 타고 있지는 않았으니. 아빠의 운전의 역사는 해군 때부터 시작이 되었나보다. 말수가 적은 아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날. (군인이던 남편과 연애할 때 그렇게 사람이 커보이고 멋있어 보였던 건 그 사진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가족들도 모르게 해군에 지원해서 어느 날 "형수 나 내일 군대 가요"라고 했단다. 큰형네 얹혀살며 많이 미안했던 걸까. 아빠는 군대에 자원하면서 20여 년의 마음 속 더부살이를 직접 끊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고등학생 때는 딸들의 안전한 하교를 위해 매일 저녁마다 아빠가 데리러 왔다. 버스를 타고 가면 2,30분. 아빠차를 타고 가면 10분.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10분, 20분 자식의 편의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기다리는 게 당연했던. 내가 직장인이 되어서는 저녁 늦게 오는 날이 많았는데 귀갓길이 어둡고 변태를 만난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아빠는 밤마다 지하철역에 데리러 나오곤 했다. 아빠는 아직까지도 자식을 위해 바퀴를 굴린다. 공항에 가는 일이 생기면 "아빠가 노는데 뭐 하러 택시를 부르냐"며 입출국일마다 새벽이든 늦은 저녁이든 왕복 2시간 걸리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비행기 연착으로 늦어져 하염없이 기다려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다. 그저 당연한 듯이. 아무 군소리 없이. 본인은 어둡고 차갑고 뜨거운 그 긴 길을 더 어린발로 뛰어다녔으면서.
어린 날에는 동생들을 업어 키우느라, 성인이 되어서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세 남매를 기르느라 타인을 위한 삶에 닳고 닳았을 그의 꼿꼿한 등이 어린 내 눈에도 종종 가냘파 보였음을.
그런 그의 등이 더 이상 가냘파 보이지 않은 때는 퇴직하고 손주를 보고 나서다. 내리사랑이라는데, 아빠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내리고 또 내리었다. 아기가 신생아 시절 혼자 육아가 버거울 때 아빠는 딸을 위해, 손주를 보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나와 아기를 위해 발걸음을 했다. 아빠가 오는 시간은 언제나 내게 숨통이었다. 어릴 때도, 어른인 지금도 나는 아빠의 돌봄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아이의 하원을 도와주고 계신다. 언제나 성실했던 아빠는 육아의 시간마저 성실했다. 그 시간은 그의 에너지이자 삶의 낙이었다.
아빠는 세 남매를 낳고, 손주를 보며 사랑을 주고 또 주면서 그의 허기를 사랑으로 가득 채운 것처럼 보였다.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찾은 걸까? 내 바람처럼 아빠의 마음이 서러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