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느린 마을 일기

by 이나

앞서 기록한 에피소드들은 느린 마을로 이사 온 9년 간의 이야기를 각각 변화의 흐름에 따라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못할 만큼 내면에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이 글을 완성하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속에서 올라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마음의 소리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공격하고 과거의 아픔을 꼬집고 사람들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불신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소리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똑같이 괴로움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회의를 느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그것들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는 거다.


예전에 나는 온갖 프레임에 나를 가둬놓곤 했었다. 남들 눈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남에게 나쁜 평을 들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불편한 공간, 불편한 일, 불편한 결정도 아닌 척하려고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나중에 내색하지 않던 감정이 들통나 일을 망친 적도 여러 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편하고 싫으면 안 하면 되는데 왜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남들이 다 하는 거니까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걸 하려면 이걸 해야 해.” 같은 생각을 많이 했으니 그중에 내가 좋아서 한 건 거의 없었다. 남들 눈에 내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일이 지금 보니 다 쓸모없는 일이다.

남들 말 너무 들으면서 살 필요 없다. 그들이 다 알고 말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누구도 뭘 다 알고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 말이 맞고 틀리고는 실은 내가 결정하는 거다. 조언하는 대상이 당신이 바라는 인간상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 말 들으면 된다. 아무리 돈 많고 세상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사람이라도 당신이 원하는 인간상이 아닌 사람 말은 굳이 들을 필요 없다. 그리고 조언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조언하는 사람은 그저 잔소리가 하고 싶은 거니까 굳이 마음 쓸 필요 없다.

여태 내가 나를 너무 가둬놓고 살았던 것 같다. 드디어 해방감을 느낀다. 나로부터 해방. 세상으로부터 해방. 그러면 그러라지. 망하면 망하는 거지. 왜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왜 실패를 두려워했었지?

어릴 때 우리가 배운 건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었다. 넘어져도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아니 배웠다는 말도 웃긴다. 그냥 몸이 알고 있는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몸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두려웠던 걸까?

뭐가 됐든 어떻게 되든 될 대로 될 테니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왜 뭔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삶은 이대로도 충분히 완벽한데.


나는 오늘도 살아있다.


이제야 드디어 기나긴 인생을 살아낼 기초 작업을 끝냈다. 여기까지 오느라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60년은 적어도 고통에 파묻히지는 않을 테니 밑지는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제 나는 내 삶의 방식을 찾았으니 길을 헤맬 필요가 없고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와도 당황할 일이 없다.

파도 타는 법을 배웠다.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진짜 해방이다.

이전 29화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