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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Jan 06. 2024

무명, 신기한 것을 보다

AI 이론으로 도덕경의 핵심 개념을 설명하다

道可道, 非常道.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며     

名可名, 非常名.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상명(常名)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무명은 세상의 시(始)와 같은 것이고 이름을 지을 때 세상 만물이 생긴다.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그러므로 무욕(無欲) 즉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면 기존의 언어나 지식으로 잡지 못한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볼 것이고 유욕(有欲) 즉 보고자 하는 대로 세상을 보면 늘 보던 세상만 보게 될 것이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이 둘은 원래 같은 것이고 이름을 달리 한 것뿐이다. 원래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새로운 모습은 가물가물 잘 안 보인다. 보일 듯 말 듯 잘 안 보이지만 온갖 기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제1章) 


도덕경에서 가장 유명한 장으로 도덕경의 핵심 개념인 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상은 무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만물은 무명에 이름을 불러줄 때 생긴다. 여기서 생각나는 시(詩)가 하나 있는데 바로 김춘수 시인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가 단순히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읽힐 수 있지만 ‘무명’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나’에게 와서 그 무엇이 된다는 도가철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시인은 노자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 시를 짓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도덕경 제1장과 구분이 안 된다.

  내가 도덕경을 처음 접했을 때 1장의 ‘무명’은 뭘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면서 한참을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게 뭔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경전이 세상에 나온 이후 2500년 동안 수많은 현자가 주석을 달아서 해설서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해석은 없었다.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해석이다.

  그러던 몇 년 전 어느 날 산책길에서 문득 요즘 4차 산업혁명의 아이콘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AI에서 말하는 ‘데이터’가 혹시 도덕경의 ‘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터를 학습해서 모델(패턴)을 얻는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이 장에 대입해 보면 ‘무명’은 ‘데이터’이고 ‘유명’은 ‘모델’ 또는 ‘패턴’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개념이 AI 알고리즘으로 설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도덕경 읽기가 훨씬 편해졌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작동 원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신경망으로 숫자에서 패턴 찾기’ 정도랄까. ‘지능(intelligence)’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나오지만 이런 뜻풀이는 조금 관념적이어서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뇌과학자들은 ‘지능’을 그냥 ‘예측 능력’이라고 간단히 정의해 버린다. 이 둘을 합치면 AI는 ‘신경망으로 숫자에서 패턴을 찾는 능력’이 된다.

  이렇게 놓고 도덕경 1장을 해석해 보면 흔히 우리는 오감(五感)으로 들어오는 데이터를 모두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만물은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계가 진짜 숫자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세계를 모두 숫자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세상은 TV의 모니터를 보는 것과 같다. 모니터는 바둑판처럼 수많은 픽셀(Pixel)로 구성되어 있고 이 픽셀은 전구라고 보면 된다. 전구는 ‘0(소등상태)’과 ‘1(점등상태)’을 표현할 수 있다.(그 중간값도 가능하다) ‘0’이면 픽셀에 불을 끄고 ‘1’이면 불을 켜서 영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인간의 눈도 TV 모니터처럼 0과 1로써 외부 세계를 영상으로 구현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본다’라는 것의 실체다. 망막으로 들어온 빛이 0과 1 및 그 중간값을 매긴 전기신호로 바뀌면서 뇌에 영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들어온 빛(데이터)이 뇌에서 영상으로 바뀌면 다시 뇌 신경망은 이 영상(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데 이것을 우리는 ‘학습’이라 부른다. 이 패턴은 수없이 많은 영상(데이터)을 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점점 더 정확해진다. 학습 끝에 얻어진 가중치(加重値)를 정답과 비교해 주면 이를 ‘지도학습(指導學習)’이라 하고 정답이 없이 패턴을 찾는 방식을 ‘강화학습(强化學習)’이라 한다. 학습을 빨리하기 위해서는 지도학습이 훨씬 유리하지만, 우리가 제시한 정답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알파고는 인간이 수천 년 경험에서 얻은 수(패턴)뿐만 아니라 인간이 터부시 하거나 심지어 알지 못하는 수(패턴)까지 찾아내서 이세돌과의 바둑 경기에서 이겼다. 인간이 보기에 이것도 수가 되나 싶은 것도 있다. 이는 ‘지도학습’으로 알고리즘을 상세하게 줄수록 인공지능은 낮은 수를 찾는 것으로 그친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훨씬 높은 수를 찾으려면 정답으로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않는 ‘강화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 그럴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앞서 말했듯이 ‘본다’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눈(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데이터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대개는 어린 시절에 뭘 보고 뭘 들을지가 결정되는데 성인이 된 이후는 그 틀 안에서 세상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답을 주면 뭘 보고 뭘 들을지를 규정하기 때문에 그 밖의 데이터는 보지 못한다. 신경망은 한정된 데이터를 가지고 학습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얻어진 패턴은 당연히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뭘 보고 뭘 들어야 하는지 생후 3년 안에 결정된다고 한다. 이것으로 그 아이의 감수성이 결정된다. 인공지능의 정의를 이 장의 용어로 다시 써보면 ‘도(道)를 닦아서 무명(無名)에서 유명(有名) 찾기’ 정도 되겠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대상(데이터)에 대해 관점(모델)을 가질 때만 그것을 볼 수 있고 관점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상이란 것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고 누군가의 관점으로 본 그것은 진리가 아닐 수 있으며 그 사람만의 고유한 시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1장에 나오는 유욕(有欲)은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관점’을 말하는 것으로 ‘나’의 관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남의 관점을 내 관점으로 착각해서 보지 말라는 뜻이다. 상무욕이관기묘(常無欲以觀其妙)의 뜻을 다시 풀어보자. "이미 만들어진 누군가의 관점이 아닌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관점은 신기한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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