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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Dec 30. 2023

과학과 성리학

원래 우리의 고민이 뭘까를 생각해 보면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도(道)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후왕(侯王)이 만약 이 도(道)를 지킨다면 세상 만물은 절로 덕에 동화(同化)될 것이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그러나 움켜잡혀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되면 나는 장차 무명지박(無名之樸)으로써 마음을 가라앉힐 것이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은 장차 보이는 대로 보게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니 마음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천하는 장차 절로 안정될 것이다. (제37장)


  자화(自化)와 화(化)의 쓰임이 다르다. 자화(自化)는 덕화(德化)를 말하는데 덕(德)에 동화(同化)된다는 뜻인 반면에 화(化)는 끄달리다, 휘둘리다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 그렇지 않으면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유명(有名)에 끄달려서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명지박(無名之樸)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섣부른 예단을 멈추고 끝까지 보라는 뜻이다.

  피타고라스가 “만물(萬物)은 수(數)”라고 한 것처럼 노자는 “세계는 무명지박(無名之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무명지박(無名之樸)이 무엇일까? 무명지박(無名之樸)은 갓 베어낸 원목(原木) 같은 무명(無名)이다. 가공하거나 제재(製材) 하지 않은 갓 베어낸 통나무를 박(樸)이라 하고, 보기 전의 이 세계는 박(樸)과 같다고 해서 무명지박(無名之樸)이라 이름 붙였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은 시(始)이자 데이터(DATA)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무명지박(無名之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은 늘 눈앞의 온갖 것에 끌려다니는 충동성(衝動性) 욕구와 한 번 꽂히면 잘 바뀌지 않는 고정관념(固定觀念)에 의해 항상 휘둘린다. 우리는 이것에 의해 가공되고 제재된 왜곡된 세계를 보고 있다. 즉 선입견과 헛된 망상으로 실제 세계를 왜곡해서 만들어 낸 허상(虛像)을 보고 있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을 보라’는 말은 어떤 상황이나 현상도 관념적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서 보지 말고,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끝까지 관찰하라는 것이다. 즉 데이터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노자는 유명(有名)에 끌려다니지 말고 갓 베어낸 원목(原木) 같은 무명(無名)을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고 한 것이다. 인간은 늘 하던 대로 하면 힘이 덜 든다. 우리가 일상(日常)을 선입견이나 편견, 고정관념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은 언제나 힘이 많이 든다.


  한반도에서 철저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가장 의미 있는 지적 활동을 한 사상가를 꼽으라면 다산 정약용을 들 수밖에 없다.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조선에 대해 애타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조선의 망조를 정확히 인식한 탁월한 사상가였던 그에게도 현실 인식에 있어서 오류를 드러내기도 한다.

  다산은 당시 세계정세나 일본의 발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일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면서 잘라 말한다. 당시 일본은 엄청난 양의 성리학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가져가서 연구하고 있다면서 향후 일본은 도덕적 성품이 높아져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나쁜 습관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산조차 관념적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놓고 만다. 다산이 이런 안이한 인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70년 만에 일본은 조선을 강제 합병한다.

 더 놀라운 것은 성리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다산의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인식이 앞 뒤가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은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병들었다'고 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성리학을 배워서 도덕적 성품이 높아질 것이다'라는 모순적 상황인식은 뭐지? 하는 것이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조선은 성리학의 종주국인 중국보다 더 열심히 성리학을 연구해 온 나라가 아니던가. 다산 자신의 말대로라면 어느 나라보다도 도덕적 성품이 높았어야 할 그런 나라가 병들어 망조가 들었다?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했던 다산마저도 복잡한 현실세계를 성리학적 인성론이라는 단순한 근거로 재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부지런히 현실세계에서 직접 문제를 찾아내기보다는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정조와 더불어 조선의 개혁을 꿈꾸었지만 여전히 인식의 지평은 유학의 성론에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사회의 폐쇄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산의 오류는 다양성이 있는 현대사회 같았으면 금방 오류를 지적하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가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사상적 경직을 겪고 있었을 터이니 누구도 그의 글을 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설사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글을 보았더라도 딴지 걸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양이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문명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과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조선의 성리학과 뭐가 달랐을까를 생각해 보면 한마디로 '내가 얻은 걸 누구나 만질 수 있고 트집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마다 고유한 무늬가 있다. 이걸 다양성이라고 한다. 서양 사회가 사상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경도될 우려가 있을 때면 그들은 이 '다양성'으로 해결해 왔다. 우리에게는 없는 이 부러운 가치를 잘 지켜왔기에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이 지점을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산이 만약 70년 후 한일합방을 목격했다면 어떤 고민을 했을까. 아마 조선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당시 지식인들 중에서 그런 고민을 한 사람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 고민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쉽게도 구한말부터 닥쳐오기 시작한 엄청난 시련 앞에 이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이 급박하게 떠밀려 왔기에 우리에게는 고민의 단절 같은 것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왠지 지금 남의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은 뭘까. 우리에게는 구 문제, 노동 문제, 환경 문제, 인권 문제, 정보 불평등 같은 현대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분명 우리의 문제인 건 맞지만 원래 우리가 가졌던 고민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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