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有名)의 끝판왕
정자와 주자 이후 사람들은 저술할 필요가 없다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천하에는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를 시(始)라 하고 이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는다. 그 어미(無名)를 먼저 얻어서 그 자식인 유명(有名)을 알고 그 자식(有名)을 먼저 알아서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다시 그 어미(無名)를 지키면 몸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구멍을 막고 문을 닫으면 몸을 마칠 때까지 지치지 않는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구멍을 열고 일을 다루면 죽어도 구원되지 못한다. 널리고 널린 보잘것없는 것을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켜나가는 것을 강(强)이라 한다.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襲常
그 빛을 써서 명(明)으로 다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습상(襲常)이라고 한다. (제52장)
무명(無名)을 모(母)에, 유명(有名)을 자(子)에 비유해서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명(無名)은 이미 언급했듯이 DATA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빅데이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먼저 무명을 얻어 유명을 알고 그 유명을 알아서 다시 무명을 지킨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따라서 무명은 유명을 낳고 유명은 무명을 낳는다.(有無相生) 자세히 살펴보고 유연함을 지킨다면 재앙은 오지 않는다고 하며 이를 일러 습상(襲常)이라 한다.
인간이 바깥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감(五感) 같은 하드웨어만 가지고는 보고 듣지 못한다. 뭘 보고 뭘 들어야 하는지를 먼저 학습해야 한다. 반드시 이 오감을 구동시키는 인식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마치 컴퓨터 하드웨어의 구동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카메라 같은 각종 센서를 작동시킬 수 있는 거와 같다. 인간이 뭘 보고 뭘 들어야 하는지는 최초 학습한 것이 무엇이었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 속에서 그의 고유한 인식체계의 최초 버전이 만들어진다. 보통 3살 때까지가 뭘 보고 뭘 들을지가 결정되는 시기다. 따라서 어릴 때 좋은 경험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서 그 아이가 볼 수 있는 인식의 대역폭을 최대한 넓혀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은 먼저 모(母) 집단 데이터에서 뭘 봐야 하는지 그 특징을 포착하고 다시 그 특징을 가지고 이후 들어오는 데이터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우리 뇌는 데이터(無名)의 특징이나 패턴을 개념화(有名)해서 이 세계의 모형을 만들어서 본다. 결국 인간은 이 세계를 온전히 다 보지 못하고 학습한 것만 보게 된다. 그것은 속성상 편향된 데이터이며 그렇게 편향되어서 학습한 것조차도 개념화시키면서 한 번 더 데이터를 왜곡한다. 유명의 한계는 분명하고 심각한 대가가 따른다. 유명은 뭘 봐야 하는지 짚어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집착을 낳는다.
모(母) 집단 데이터(빅데이터)에서 새로운 데이터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기존 관점(감각)을 구동시키는 선입견이나 기존의 가설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 마치 컴퓨터 프린터에 기능을 하나 추가하거나 수정하기 위해서는 장치 드라이버(펌웨어)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관점(감각)’에 대해 수정하는 것 역시 ‘관점(감각) 펌웨어’에 대한 드라이버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다만 드라이버 업데이트할 때 기계는 추가 또는 수정할 부분에 대해 사람이 코딩하지만, 인간은 깨달음이나 통찰을 통해 관점을 스스로 코딩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여기서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를 해석해 보면, 쉽게 손에 잡히는 개념에 끌려다니지 말고 데이터를 분석하면 일이 쉬워지고, 관념적 훈고학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은 패가망신(敗家亡身)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즉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한 현실 인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느 선사의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와 맞닿아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니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모른다는 자세를 끝끝내 지켜낸다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우리가 매사에 “오직 모를 뿐”이라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꾸준한 훈련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된다. 자꾸 훈련하면 습관이 된다.
BC 7~4세기를 '축의 시대'라고 한다. 대체로 이 시기에 동서양의 성인이 나온다. 이들이 우연히도 동시대에 출현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문자의 역할이 큰 것 같다. 문자가 추상적인 개념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 작동하면서 이 시기에 '개념'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고 성인은 '개념'과 함께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개념은 말에 의미(意味)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은 '그걸' 말하는 성인을 환호한 것이 축의 시대의 전말인 듯하다. 현재의 이 세계는 과거의 '성인'들이 구축한 사유의 세계이고 우리는 성인이 만들어 놓은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는 셈이다. 장자(莊子)는 윤편(輪扁)의 고사를 통해 책과 개념은 성인이 만들어 놓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하지 않은가. 하지만 유명(有名)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이 유명에 중독되면 다른 게 잘 안 보인다.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성리학의 성론(性論)처럼 말이다. 남명 조식 선생은 '정자와 주자 이후 사람들은 저술할 필요가 없다( 程朱後 不必著述)'는 말을 남겼고 남명 자신도 문집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인즉은 어떤 것이 사람다운 건지는 고대의 성인들이 좋은 말을 다 해놓았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은 그 말을 실천만 하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히 유명(有名)의 끝판왕이라 할만하다. 이 말을 듣자니 필자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당시 사람들은 어떠했을지 내 머리로는 짐작도 안된다.
우리가 성인이 만든 이 세계를 탈출할 유일한 길은 맛은 없지만 무명(無名)을 보고 만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노자가 후왕(侯王)들에게 간청하는 말이 있다.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치를 하라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그러면 노자가 '후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되지 않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고 말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권력이 집중된 사회에는 개인의 감수성이 말살되어 데이터가 쌓이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은 노자의 이상적인 국가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