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우니 Dec 16. 2023

공자의 인(仁), 노자의 불인(不仁)

세상은 그냥 데이터 일 뿐이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세상은 불인하여 만물을 추구처럼 여기고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성인은 불인하여 백성을 추구처럼 여긴다.     


天地之間, 其猶槖蘥乎!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세상은 마치 거대한 풀무와도 같아서     


虛而不屈, 動而愈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비어도 꺼지지 않고 움직이면 더욱 활활 타오른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말이 많으면 쉽게 궁색해지니 이쯤 해 두는 것이 나을 듯싶다.

(제5장)


芻狗(추구)는 祭(제)를 지낼 때 쓰는 짚으로 만든 개모양의 희생양(犧牲羊)으로 祭事(제사)가 끝나면 버리는 물건이다. 다시 말하면 헌 짚신짝과 같이 필요 없으면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물건이다. 세상은 이 芻狗(추구)처럼 사람의 감정이 투영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성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세상은 인정이 없는 비정(非情)의 존재라고 한다. 인간적인 감정이나 가치의식(價値意識)을 전혀 갖지 않은 차가운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인정이 없다. 천지 대자연은 무자비한 존재이다. 그것은 일체 만물을 마치 제삿날에 쓰는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제사가 끝나면 길거리에 버려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다.

  그 천지불인(天地不仁)을 깨달은 성인(聖人) 역시 인정이 없는 무자비한 존재다.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을 그는 마치 제삿날 쓰는 추구,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제사가 끝나면 길거리에 버려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다. 백성을 다스리되 보통 일반의 인애(仁愛)나 자비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면 그뿐이다. 노자의 이런 비유는 세상이 차갑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강한 표현이다. 아마 유가의 가르침을 의식하다 보니 강한 표현을 썼던 모양이다.

  세상이 원래 이처럼 불인(不仁)한데 유가(儒家)는 인애(仁愛)를 가르친다. 인(仁)은 유가에서 최고로 치는 덕목이다. 이른바 인애(仁愛)의 도덕이다. 그러나 공자(孔子)의 인애(仁愛)는 노자(老子)의 불인(不仁)이나 묵자(墨子)의 겸애(兼愛)와는 다르다.

  묵자는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무차별적(無差別的)인 사랑을 가르쳤다. 기독교의 정신과 상통한다. 그러나 공자가 가르치는 인애에는 차별(差別)이 있다. 사랑하되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맹자(孟子)는 묵가를 일러 ‘아비도 몰라보는 새나 짐승과 같다’고 비난하였다. 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니 횡적 질서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빨리 정착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공자의 인애(仁愛)’ 때문이다. 공정해야 할 공적인 활동들이 인정에 이끌려 우리 사회의 공정의 가치와 평등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공정과 평등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간이다. ‘공자의 인애’가 역사적 수명을 다했음에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지금도 우리의 의식 속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다. 가면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다가 때가 되면 끼리끼리 모인 패거리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온갖 부조리를 낳고 만연 시켜 사회 불평등 구조를 만든다. 고대사회에서 공자의 인애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서 공자 자신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이데올로기이다. 자신들의 패거리 문화를 용인해주고 하층민들에게는 인성론을 내세워 감당키 어려운 성(性)의 의무를 지워서 권력을 공고히 한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 정치가들이  인성론을 내세워 얼마나 혹독하게 사람들의 삶을 옥죄어 왔는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성(性)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나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서 노자의 위대함이 보인다. 노자는 공자와 다르게 인(仁)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의 도덕경에서 성(性)이라는 글자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의 가르침은 통일제국으로의 도도한 시대 흐름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었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나 우리가 하루아침에 서양인의 의식구조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더 흘러서 ‘국민’에서 ‘시민’으로 의식이 깨어나야 가능하다.

  우리 사회가 늘 시끄럽고 혼탁한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하는데 인사에 AI를 도입하면 훨씬 공정해지지 않을까? 인사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AI를 도입하면 인간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뢰받지 않을까? 왜냐하면 AI는 성인처럼 불인(聖人不仁)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무명(無名)은 담백하니 맛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