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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Dec 09. 2023

 무명(無名)은 담백하니 맛이 없다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

대상(大象)을 잡고서 세상에 나가면 아무런 해가 없으니 세상이 안락하고 평화롭다.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흥겨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손(客)을 멈춰 세우지만 입에서 나오는 도(道)는 담백하니 맛이 없다.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그것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아무리 써도 다 쓸 수가 없다. (제35장)          


  執大象은 14장의 執古之道이다. 보일 듯 말 듯 잘 보이지 않는 무명(無名)에 대해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무명(無名)은 그 위아래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눈에 잘 포착되지 않는다. 도를 닦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바로 무명(無名)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무명을 들어 말하자니 맛이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유명(有名)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감각 너머에 있는 미시세계나 거시세계의 무명(無名)을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감각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무명(無名)조차도 이미 학습된 개념에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노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미 학습한 유명(有名)을 덜어내면 보이지 않던 무명(無名)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감각 너머에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얻어진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인간은 자신의 기존 관념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사람들이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하면 잘 다스려진다고 하고 급기야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해야 한다고까지 하고 있다. 이상적인 사회로서 극단적인 소국주의(小國主義)를 추구하고 있다. 기술의 혁신을 통한 생산성을 높이는데 사회시스템의 모든 역량을 모으고 있는 현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유명(有名) 즉 ‘개념(槪念)’을 바라보는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태도가 극명하게 갈린다. 노자의 도는 개념을 부정하고 공자의 도는 개념을 긍정한다. 노자는 개념이라는 도구가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게 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하고 개념을 만들고 가르치는 행위에 인색했다. 반면에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성인이 가르친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익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노자, 공자 둘 다 뭔가 부족해 보인다. 

  먼저 개념(槪念)이라는 도구를 바라보는 노자의 시각은 공자보다 훨씬 아쉽다. 노자는 개념이 감각 너머에 있는 무명의 세계까지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기능이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애써 외면한다. 오히려 개념이 가진 부정적인 기능을 과도하게 부각해서 개념을 만드는 것에 대단히 인색한 태도를 보인다. 공자는 유명 너머에 무명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아서 논할 것도 없다.

  이에 반해 고대 그리스인들의 개념을 대하는 태도는 동아시아인보다 훨씬 유연하다. 개념의 유용성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개념과 개념 사이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논증과 검증을 거쳐서 이 세계를 구축했다. 고대 중국이 개념의 위험성에 굴복했다면 고대 그리스인은 개념이 갖는 위험성에 주눅 들지 않고 개념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 시초가 BC 3C 유클리드의 《기하원론》이다. 유클리드는 이 책에서 정의 131개와 공준 5개, 공리 5개로부터 465개의 명제를 만들어 냈다.

  노자도 분명 개념의 유용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논리학과 수학이 개념의 위험성을 상당히 불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듯하다. 즉 당시 중국에는 개념을 다룰 방법이 없었다. 당시 중국이 고대 그리스처럼 개인의 자유가 좀 더 보장된 사회였다면 혹시 중국에서도 개념을 다룰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개인의 자유와 수학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겠지만 필자는 수학이 데이터를 다루는 학문이고 데이터를 알아보는 안목(감수성感受性)은 개인의 자유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외부세계의 자극(데이터)을 받아들이는 지점이 다 다르고 그 민감도(敏感度)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감수성에 의해 얻어진 유무형의 지식과 데이터를 사회적 이기(利器)로 구현하는 일은 개인이 처한 사회제도와 이념적, 정서적 분위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이 집중된 사회일수록 개인의 감수성은 말살된다. 권력의 집중도와 개인의 감수성은 정확하게 반비례한다. 

 중국에서 사상적, 경제적 자유가 꺾이기 시작한 때는 진(秦)이 통일하면서부터이다. 진 멸망 후 한(漢)이 성립하고 경제(景帝)까지의 시기에 황로사상(黃老思想)의 영향으로 민간이 주도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정(朝庭)은 민간에 대해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덕분에 문물이 크게 일어나고 국가재정은 차고 넘칠 정도로 쌓였으며 백성들의 소득도 증가한다. 중국 문명에서 이런 기조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아마 수학과 논리학이 발달하거나 아니면 꼭 수학, 논리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적절한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동아시아도 현대사회의 발전과 성장에 이바지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통일된 중국에서는 중앙집권제에 반하는 정치 이념과 학문은 사실상 필요하지 않았다. 통일 왕조의 권력자들이 왜 중앙집권제를 고집했는지는 뒤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기득권의 득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봉건제가 훨씬 더 나을 수 있지만,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최고 권력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왕과 귀족 모두가 만족하는 공통분모로서의 국가체제가 바로 중앙 집권화된 관료 시스템이다. 돌이켜보면 최악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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