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의 신분제와 과거시험의 무한 경쟁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 경쟁은 신분제라는 구조적 억압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 신분제는 양반 중심의 계층 구조를 통해 법적·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히 했으며, 피지배층에게는 과거시험이라는 좁은 문이 신분 상승과 생존의 유일한 탈출구로 남았다. 이로 인해 과거시험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고, 합격의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주어졌다. 신분제는 양반의 기득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체제였으며, 과거시험은 이 질서를 공고히 하면서도 피지배층에게 제한된 희망을 제공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구한말, 이 시기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조선의 신분제가 피지배층에게 안긴 질곡 같은 삶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중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4~1897년 조선을 방문해 쓴 기행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에서 신분제의 억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생생히 묘사했다.
조선의 신분제: 기득권 유지와 과거시험의 뿌리
조선의 신분제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계층 구조로, 양반(사대부), 중인, 평민(상민), 천민(노비, 백정 등)으로 나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반은 세금과 병역 면제, 관직 독점, 토지 소유를 통해 정치·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반면, 평민은 무거운 조세와 군역 의무를 졌으며, 천민은 법적 권리조차 거의 없었다. 신분별 형벌 차이—양반은 유배, 평민은 태형—는 법적 불평등을 공고히 했다. 유교의 효와 충은 개인을 가문과 국가에 종속시켰고, 신분 상승의 기회는 '과거시험'이라는 오직 한 길만 있었다. 신분제는 양반의 기득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양반은 관직과 토지를 통해 부를 축적하며, 하층민의 노동과 세금을 착취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과거시험은 이론적으로 평민에게도 열려 있었지만, 합격자는 연간 30~100명 내외로 극소수였고, 응시자는 수천 명에 달해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양반은 교육 자원(서당, 서적)에 쉽게 접근했지만, 평민은 경제적 부담으로 공부가 어려웠다. 신분제는 과거시험을 양반 중심으로 운영하며 하층민의 기회를 좁혔고, 이는 기득권 질서를 강화했다.
구한말 신분제의 질곡: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증언
비숍의 기록은 신분제가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과거시험 경쟁을 심화시킨 원인이었음을 외국인의 시각으로 조명하고, 오늘날 한국의 경쟁 문화를 되돌아보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 양반의 수탈: 경제적 궁핍과 과거로의 몰입
신분제는 양반의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며 피지배층을 궁핍으로 몰았다.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양반을 “허가받은 흡혈귀”라 부르며, 그들의 수탈이 평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서울 근교와 가평, 원주에서 양반이 평민의 노동력을 대가 없이 징발하거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모습을 목격했다. 예를 들어, 한강 계곡의 농민은 양반의 세금 요구로 수확의 60% 이상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비숍은 “비옥한 토양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착취로 농민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썼다.
이 경제적 궁핍은 과거시험 경쟁을 심화시켰다. 농업생산력은 낮았고, 흉년에는 빚을 갚지 못한 농민이 노비로 전락했다. 평민은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과거 합격을 통해 관직을 얻는 것이 질곡같은 삶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비숍은 지방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과거 준비로 가산을 탕진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신분제의 족쇄를 벗어나려 목숨을 건다”고 기록했다. 양반은 신분제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며 피지배층을 수탈했고, 이는 과거시험이라는 절박한 경쟁으로 몰아넣었다.
2. 노비의 비참한 삶
비숍은 서울과 평양에서 노비들이 주인의 잔혹한 처벌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노비는 주인의 소유물처럼 다뤄지며,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다”고 썼다. 예를 들어, 한 양반 가문에서 노비가 음식 준비 지연으로 채찍질당거나 고문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비숍은 이를 “야만적”이라 표현했다.
미국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1885년 조선에서 노비가 도망치려다 잡히면 참수당하는 경우를 보았다고 전했다. 《경국대전》은 주인이 노비를 때려 죽여도 큰 처벌을 면제했고, 이는 노비의 법적 무력함을 보여준다. 비숍은 노비가 과거시험에 응시할 기회조차 없다고 지적하며, “신분제는 그들을 영원한 노예로 묶는다”고 비판했다.
3. 잔혹한 형벌
양반 기득권은 피지배층을 공포로 통제하기 위해 잔혹한 형벌을 사용했다. 비숍은 한강변에서 세금 미납으로 체포된 평민이 채찍으로 수백 대 맞는 모습을 보고 “이 형벌은 백성들을 겁주기 위한 공연”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도둑질 혐의로 잡힌 농민이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고문당하는 장면을 기록하며, 양반의 법적 면제와 대비되는 평민의 고통을 지적했다. 미국 선교사 사무엘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t)은 평양에서 “관료가 평민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며 군중에게 경고를 주었다”고 썼다.
A. H. 새비지 랜도어는 조선의 사형 집행에 관한 목격담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달구지가 언덕 바로 아래의 평지에 멈추고 (중략) 사형 집행인에게 인계되었다.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들은 등 뒤로 팔을 결박당하고 상투를 긴 줄에 묶인 채 얼굴을 땅 위에 떨구었다. 그들은 다시 옮겨지기 전까지 작은 발판 위에 가슴을 대고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죄인들의 자리 배치가 끝나자 사형 집행인은 그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날이 무딘 칼로 계속해서 내리쳤다."
4. 신분제 타파의 어려움과 기득권 질서
비숍은 조선의 신분제가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개혁 없이 스스로 타파될 수 없다고 보았던 거 같다. 그녀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조선의 양반 지배층이 부패와 수탈로 민중을 억압하며, 내부 개혁의 의지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비숍은 조선이 일본의 보호 아래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신분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비숍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을 통해 신분제를 폐지하고 근대 국가로 전환한 사례를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조선의 양반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태도로 인해 신분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비숍은 조선의 관료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며 개혁 요구를 묵살한 점, 천주교 탄압으로 새로운 사상을 억누른 점을 지적하며, “조선은 스스로 변혁할 능력이 없다”고 썼다. 그녀는 양반이 신분제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특권을 독점하며, 피지배층의 저항을 억압하는 구조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다고 보았다. 비숍은 일본의 강제적 개입이 신분제를 해체하고, 피지배층의 질곡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비판받을 수 있지만, 비숍의 관찰은 신분제가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과거시험 경쟁을 포함한 조선 사회의 경직성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5. 시베리아의 조선인 이주민들 : 조선의 후진성의 원인이 신분제라는 근거
"이곳에서 나는 남쪽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3일 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경찰 서장이 나를 조선 사람 마을에 안내해 주었다. 내가 듣고 본 바에 의하면 이곳 주변의 모든 농민은 조선 사람으로서 생활은 부유한 편이었다. 이곳에서 조선 국경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의 대다수의 생활 상태는 양호했으며 이주민 중의 일부는 러시아 군대에게 밀과 곡식을 납품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사람 이주민들은 중국인을 능가했다. 그들은 실제로 중국 만주에서 야윈 소를 사들여 살찌게 키워 팔았다. 조선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에게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확실한 관계 당국자의 주장에 의하면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과의 야채 시장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이 도시의 상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나는 그들이 열등 민족이었고 삶의 희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프리모르스크에서 나는 나의 의견을 수정해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그들 자신을 부유한 농민층으로 끌어올리고 러시아 경찰이나 러시아 정착민들, 군인들과 똑같이 근면하고 좋은 품행을 가진 우수한 성격을 얻은 이 조선 사람들만이 예외적으로 근면하고 검소한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기근으로부터 피난 온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재산과 일반적인 태도는 조선에 있는 그들의 동포들이 정직한 행정과 수입에 대한 정당한 방어가 있다면 천천히 인간으로 발전해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결론: 사라지지 않는 신분제의 질곡
조선의 신분제는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피지배층에게 경제적·사회적 착취를 강요했다. 양반의 수탈, 노비의 비인간적 삶, 잔혹한 형벌, 천주교 탄압, 동학 농민의 저항이 신분제가 과거시험의 과도한 경쟁을 낳는 원인임을 보여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양반을 “흡혈귀”로 비유하며, 피지배층이 “수탈과 억압 속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조선이 신분제와 기득권 질서를 스스로 타파할 수 없다고 보고, 일본에 의한 근대화를 지지했다. 이 대목에서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필자도 상당히 공감하는 바가 있다. 우리의 신분제은 그 역사가 가히 3천년이 넘고, 지금도 이 고대의 관습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딜 가나 가부장적 수직구조가 기본값으로 세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