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의 과도한 경쟁의 또 다른 원인, 농본주의의 시작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 상승을 위한 과거시험은 인생을 걸기에 충분하다.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니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통치이념으로 유교와 농본주의(農本主義)를 내세운 것이 경쟁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조선은 왜 농본주의가 필요했을까?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의 무장세력과 힘을 합쳐 당시 고려의 기득권이었던 권문세족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그들은 혁명은 했어도 신분제를 타파하지 않았으니 시스템은 그대로였고 사람만 바뀐 셈이다. 신분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만으로 불안했던지 이에 더해 추가적인 조치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농본주의 통치이념의 전면적인 시행이었다.
명나라는 1368년에 건국했다. 그리고 조선은 25년 후인 1392년에 신진사대부에 의해 세워진다. 신진사대부는 유교의 정치이념에 따라 명나라의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농본주의를 그대로 가져와서 시행한다. 관료제는 신분제를 더욱 정교하게 조직화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사대부를 지배층으로 하는 기득권적 질서는 신분제와 관료제 그리고 또 다른 한 축인 농본주의로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동아시아는 농본주의 체제 속에서 비록 시련은 있었지만 분명히 해양사(海洋史)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역대왕조가 해상문화를 자신의 문명체계로 수용하지 않다가 명나라 때 이르러 아예 소탕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이에 답하려면 중국의 전통적인 통치이념인 농본주의의 기본성격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해양사와 농본주의 통치체제에 대한 탁월한 연구성과를 보여주었던 김성호 박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선 통전(通典) 권 46 길례(吉禮) 적전조(籍田條)를 보면, 천자가 친경(親耕)으로 백성들에게 권농했다는 적전제는 주나라 때부터의 전통이라 하지만, 이것이 문헌적으로 확실하게 기록된 것은 전한(前漢) 때였다.
즉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BC 97) 효문제 2년(BC 178)정월조에 "농(農)은 천하의 본(本)이다. 적전을 개설하여 친경으로 종묘에 곡식을 넉넉히 급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이 이후 역대왕조는 물론 고려와 조선까지 모방하였던 농본주의 통치이념의 선포였다.
그리고 효문제 13년(BC 167) 정월에 다시 "농은 천하의 본이어서 그 임무는 막급하다. 이에 부지런히 종사하게 하면서도 조세의 부담은 본(농업)과 말(상공업)이 전연 동일하여 권농지도(勸農之道)가 전연 마련되지 않았으니 전세(田稅)를 감면하라"고 엄명하였다. 농업의 상대적 불리성을 조세로 커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여의치 않자, 한서(漢書) 권5 경제본기 후원 3년(BC 141) 정월조에 이르러 재차 "농은 천하의 본이다. 황금주옥이라도 굶주릴 때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지 못하며 오로지 패물일 뿐임을 알지 못한다. 흉년이 드는 것은 말자(末者 : 상공인)가 많고 농민이 적기 때문인 즉 전국에 명하여 농상(農桑)을 권하고 종수(種樹)를 늘리어 의식을 더 얻게 하라. 관리들은 만약 황금주옥을 가진 자를 발견하거든 2천 석을 훔친 자와 같게 벌을 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결국 농본주의란 적전제의 이념에 따라 시달된 단순한 선언적 표방이 아니라 실은 조세로서 농(農)을 보호하되 농업보다 유리한 상공업은 형벌처럼 엄격하게 억제하라는 네거티브 농업보호시스템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권농억말"(勸農抑末)이다. 이것은 마치 농민만을 유일한 잉여가치의 생산계급으로 규정하였던 불란서 F. 케네(Francois Quesnay : 1694~1774)의 중농주의적 편견과 궤를 같이 한다. 사회경제적 직업분화를 왕권으로 봉쇄한 농업 일변도의 강요책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비록 역사를 편수하는 태사공(太史公)의 공직신분이면서도 당시의 국시였던 농본론에 정면으로 맞섰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즉 사기(史記) 권129 화식열전에서 그는 "무릇 가난한 자가 부를 얻으려면 농은 공만 못하고(農不如工), 공은 상만 못하며(工不如商), 여인이 자수놓기보다는 차라리 저잣거리의 문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낫다(작부노릇?). 말(末:상공업)이라야 가난에 보탬이 된다"고 갈파한 것이었다.
산업별 수익성이 〈농→공→상→서비스〉의 순인 만큼 돈 벌려면 농을 집어치우고 공·상·서비스에 종사하라는 것이다. 놀라운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그렇다. 농사란 한 톨의 씨앗을 뿌려 열 배, 백 배의 수확을 얻더라도 농민의 수익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자기 품(노동력)을 팔아 먹는 것이 고작이다. 왜 그러한가. 동아시아 농업은 다모작(多毛作)인 남부지역과 일모작(一毛作)인 북부지역이 비록 다르더라도 농업이란 원래 계절산업이어서 노동력 투하의 계절적 번한(繁閑)이 불가피하고 더더욱 일모작 지대에서는 여름 한철 일해서 1년을 먹고사는 반년 노동자에 불과하다.
때문에 설사 자작농이라고 하더라도 그 보수는 1년 내내 품팔 수 있는 공·상·서비스 분야의 노동보수보다 자연 낮을 수밖에 없다. 저위기술에 입각한 가족적 소농경영은 빈곤 그 자체일 뿐이다. 가족적 소농경영의 한계를 찌른 사마천의 지적이야말로 소농경영이 무조건 존속할 것으로 믿어 왔던 현대의 농업경제학자를 훨씬 능가한다. 사마천이야말로 놀라운 통찰력과 농본주의 통치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용감한 비판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기(史記)는 역대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의 제1권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완전히 생매장되고 말았다. 어느 통치자도 그의 경제노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북송시대(960~1126)에 중상주의가 표방되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었다. 역대왕조는 산업의 분화가 저지된 농본주의적 대국체제 즉 천자론(天子論)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백업한 것이 공맹론(孔孟論)에 입각한 유교주의 전제정치였다.」
즉 한(漢)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왕조가 통치이념으로 농본주의를 채택한 이유는 대륙의 분열을 우려한 일국주의 또는 대국주의 때문이다. 상공업은 일국주의에 균열을 내는 체제분해요소로 본 것이다. 실제로 일국체제 말기에는 어김없이 농본주의가 퇴색하고 그와 함께 정권도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