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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의 파시즘은 어디서 오는가?

조선사회의 과도한 경쟁의 또 다른 원인, 농본주의의 한계

by 너우니

농본주의는 신분제와 결합하여 사회적 위계서열에서 공(工)과 상(商)은 농(農)보다 낮은 지위를 부여해서 천시하였고 각종 규제를 통해 산업 분화를 막았다. 이는 장자상속을 하여 농업에서 배제된 2, 3남은 도시로 가서 상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유럽이나 일본과 달랐다. 유교의 효 사상에 기반한 분할상속제는 토지를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지만, 오히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토지가 세분화되어 경작 규모를 더욱 영세하게 만든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10정보의 토지가 3남매에게 나누어지면 각자 3.3정보, 다음 세대에는 1정보 이하로 줄었다. 농사로 부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평민은 자연히 과거시험에 눈을 돌렸지만 과거로 등용할 수 있는 관직의 수는 극히 적었다. 조선 사회의 전체 관직 수와 농가 1호당 경작규모는 농본주의 정책의 낮은 농업생산력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다.


조선은 관료제 국가를 지향했지만, 연간 과거 합격자는 30~100명 내외로, 응시자 수천 명(예: 영조 12년 초시 7,000명)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조선의 전체 관직 수는 중앙과 지방을 합쳐 약 5,400여 개로 추정된다. 《경국대전》(1485) 편찬 이후, 중앙 문반직은 약 900개(정직), 무반직은 약 4,400개(정직 및 겸직)였으며, 지방 관직과 잡직이 추가되었다. 이는 당시 인구 약 700~1,000만 명(17~18세기 추정)에 비하면 고작 0.05%밖에 안되는 매우 적은 숫자다. 현재 공무원의 숫자가 국가직과 지방직을 다 합쳐 117만명 정도로 전 국민의 2.2%에 해당한다. 5,400개라는 관직의 수는 역으로 당시 농업만으로 관료들의 녹봉을 지급하기에는 재정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는 낮은 농업생산력 때문이었다. 당시 1인당 경작지 면적은 0.3~0.5정보로, 당시 영세한 농가에서 거둔 조세로는 관료의 숫자를 확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이는 조선이 국가 시스템의 모델로 삼아온 중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으니 농본주의 동아시아에 대한 김성호 박사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건 세월이 흘러 기강이 이완되면, 이 틈새를 뚫고 이기심에 결부된 갖가지 분화와 다양화가 마치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당연한 역사의 추이였다. 이 결과로 농민층이 분해하여 농본주의가 점차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전가보도처럼 으레 휘둘렀던 것이 다름아닌 "기말이반본(棄末而反本)이었다. 이것은 사회적 진화와 분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말"(상공업)을 폭력적으로 배제하고 "본"(농업)으로 복귀하는 일종의 역사적 반동작용이었다. 이 결과로 상공업의 최첨단인 해외무역을 전담하였던 해민들은 필연적으로 탄압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효문제의 농본론(BC 178) 공포 이후 진무제의 호조식(戶調式:282), 수문제의 균전제(均田制:598), 그리고 명태조의 이갑제(里甲制:1369)가 시행될 때마다 단행되었던 세 차례의 해금조치(海禁措置)였다. 이 때마다 해민들이 어떻게 탄압받았는지는 이미 본문에서 언급한 터여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세 차례의 해금조치에 있어서 제1·2차와 제3차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즉 진무제와 수문제에 의한 제1·2차 해금조치는 비록 해민들을 탄압했더라도 이들의 본거지인 주산군도를 그대로 둔 채 단행함에 따라, 이들의 해상활동은 미구에 다시 되살아났으며 오히려 활성화되는 경향까지 보였었다. 이에 반해 제3차로 단행된 명태조 주원장의 해금정책은 주산군도부터 쳐부순 발본색원적 탄압이어서, 이로써 야기된 300년간의 명대해란(明代海亂)을 통하여 해민들은 영원히 소탕되고 말았던 것이다.

- <중략> -

결국 세 차례의 해금정책으로 불붙었던 동아시아 해역의 소용돌이는 농본주의와 통상주의, 중국대륙과 주산군도, 대륙민족과 해상민족, 그리고 땅과 바다의 처절한 대결이요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소멸할 때 개시된 서구동점(西區東漸)은 결과적으로 해민들이 퇴장한 빈 무대 위에 서구열강이 초청된 격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농본주의가 20세기 중반까지도 의연 계속됨에 따라 1990 현재 중국의 농가 1호당 경작규모는 전국평균 0.42헥타(1,280평)이며, 2억2천만 농가의 6할 이상이 집중된 해안지역의 영세성은 더욱 극심하여 광동성은 0.2헥타, 강소성은 0.3헥타이다. 대략 1.3헥타 내외의 한국·일본·대만 농가에 비해 고작 1/6 내지 1/4에 불과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자론에 입각한 중국의 역대왕조는 역사적으로 세계최대의 천하대국을 건설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세계 최소의 좁쌀알로 전락한 것이다.

천하대국과 천하제일의 영세빈농!

천자론에 입각한 농본주의가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의 산업분화·지역분화를 거부함에서 자초된 역사의 반동현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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