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된 권한과 과도한 예우가 파시즘의 온상일지도
필자가 다작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생각이 고이지 않으면 글을 쓰질 못한다. 그래서 한참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는 점 이 글을 읽어 주신 분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다만 앞으로 한 달에 한 편이라도 어찌어찌해서 글을 올려볼 예정이다.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 생각하니 부지런히 기록하고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쓸게 없으면 이번에 공부한 莊子라도 소개해 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파시즘에 대해 나름 생각한 걸 정리해 봤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근거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 현재의 이 말도 안되는 사태는 나 자신도 아직 납득이 되지 않는다. 뭔가 아직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더 있을 것인데 잘 안 보인다. 뭐가 더 있을까?를 생각해 보다가 필자가 몇 달 전에 서울과 수도권에 잠깐 들렀다가 보고 느낀 것이 아직 '풀리지 않는 내 의문'을 해소해 줄 퍼즐 한 조각이 되지 않을까 싶어 기록한다.
요 몇 년 새, 길에 다니는 차들을 보면 벤츠, BMW 같은 고급 외제차들이 부쩍 늘어난 것을 쉽게 목격하게 된다. 차에 관심없는 필자도 딱 보면 아는 그런 고가의 외제차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신호등 빨간불에 대기하고 있는 내 차 앞뒤 아니면 좌우측에 꼭 한대 정도는 외제차가 서있다. 불과 6~7년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귀가 아프게 들었던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애국주의 구호가 이제 많이 퇴색한 점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한결 좋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5월에 수도권에 간 적이 있는데 사실 거기는 여기 시골(?)만큼 외제차가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강화도 갔다가 오는 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길이 막히기는 여전했는데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같이 떠밀려가는 차들을 보면 그닥 외제차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만 보고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통계학적 표본으로서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인다.
이게 뭘까?를 생각해 보면 아마 서울과 지방의 차이, 즉 지방은 아직 권위주의적 사고가 많이 남아 있다고 느껴진다. 요즘 말로 허세문화라고 한다. 지방일수록 허세문화가 심하다는 말일 듯. 차유리에 짙은 썬팅을 해서 내부를 전혀 볼 수 없게 만들거나 신호대기하고 있는 외제차가 있으면 내 차는 가급적 한 발짝 뒤에 정차해서 옆차가 나를 볼 수 없게 한다. 지방사람들은 왜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것일까? 필자는 그곳과 그 공동체에서의 삶의 팍팍함이 자신도 모르게 허세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팍팍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아마 서열을 중시하고 그에 맞는 권한을 행사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시스템을 말하는 것일 게다. 낮은 지위에서 오는 복종의무와 비자율성은 당사자로서는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진다. 대신 자신이 속한 조직 밖의 불특정 다수에게는 나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의미로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는 어디를 가도 가부장적 서열문화가 기본값으로 세팅되어 있다. 고위직과 하위직 간의 권한차이는 엄청 크다. 권한만큼 그에 따른 예우도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사회 초년생 시절 당시 우리 부서 과장이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면서 '사무관이 되면 백가지가 바뀐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사용하는 책상, 의자 각 종 집기 등등 온갖 것을 다 바꿔 준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서운영비 같은 소소한 예산은 한도 내에서 본인 전결 내에서 맘대로 쓸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하직원에 대한 인사권도 행사한다.
관료제하에서 부서장이 부하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관료제라는 제도가 기본적으로 수직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관료제라 함은 말 그대로 '정부조직에서 일하는 공무원사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관료제의 사전적 의미는 '위계적 구조, 분업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규모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관료제는 정부뿐 아니라 기업, 노동조합, 시민단체같은 민간영역까지 광범위하게 관료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채택'이라는 말은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나 쓰는 표현이지 우리나라 같이 관료제 말고는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한테는 적절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럼에도 '채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삶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 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같이 사회 구석구석 모든 조직이 가부장적 관료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 중국말고는 드물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관료제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료시스템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도 관료시스템으로 생을 마감한다. 관료제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관료제가 갖은 장점도 분명 있겠지만 暗 역시 있고 그 부작용 또한 심각하다. 한국과 중국은 동일하게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걸어온 국가로서 사회 곳곳이 조직의 우두머리의 권한남용과 전횡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점 또한 같다.
이야기가 조금 딴 데로 샜는데 그건 다음에 논의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관료제의 특성상 서열이 높은 사람한테 주어지는 과도한 예우가 파시즘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고위직에게 주어지는 권한과 예우는 사실상 특혜에 가깝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여기에서 싹튼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어깨에는 뽕이 잔뜩 들어가 있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퇴직하더라도 그 뽕을 못 빼서 한 동안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이번 12.3 내란은 관료들이 일으킨 난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번 내란은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일으켰지만 농림부장관을 제외한 전 각료들이 이에 대해 적극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이 왜 대통령의 이런 말도 안되는 친위쿠데타 모의에 가담했을까? 이들도 대통령 못지 않게 아주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직자가 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헌법을 지켜야 하는 공직자로서의 소명의식보다는 사적인 욕망이 강한 패거리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내란은 진압되어 끝난 것이 아니고 아직 진행중이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왜 진압되지 않고 있는가? 아마 관료들이 비호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검찰, 감사원, 인권위는 물론이고 사법부까지 관료제하의 이 나라의 모든 조직은 고위공직자가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내란을 일으킨 자들을 보호하고 있다. 이들은 권위주의 시대가 종식되면 높은 서열에게 주어지는 갖가지 특혜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해하고 있다. 내란 초기 이들도 '아무리 그래도 계엄은 너무 심하지 않냐'는 표현에서 '대통령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냐. 고도의 통치술이었다' 등의 말로 바뀌는 걸 보면 손익계산을 따져보고 '성토'에서 '보호'로 태세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들 역시 패거리라는 사실이다. 패거리와 패거리가 모여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변화를 막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비선출권력이 선출권력을 압도하고 있는 나라이다. 선출권력이 비선출권력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사실상 우리 사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과거 반민특위가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1,500년 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온 거대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구심점은 중국 북경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서세동점으로 서양의 민주주의 앞에 동아시아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철저히 패배하였고 지금 우리 삶의 구심점은 더 이상 북경이 아니다. 판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필자는 앞으로 우리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권위주의는 점점 힘을 잃어갈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