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아시아 철학이 추상적 사유의 철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요즘 필자가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최진석 교수의 '생각개론'이다. 천명(天命)의 시대에서 도(道)의 시대로 넘어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 세 가지를 들어 설명한다. 그 세 가지라 할 수 있는 보편성, 객관성, 투명성은 그 이전 시대의 임의성(任意性), 주관성, 비의성(秘意性)에서 벗어나기 위한 핵심 어젠다였다. 춘추전국시대는 그 이전 시대(하, 은, 서주)의 절대권력이 행사하는 임의성, 주관성, 비의성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시대였다. 그 투쟁의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이 노자와 공자이다. 두 성인은 각자 자신이 발견한 것을 사용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노자는 '자연(自然)'이라 했고 공자는 '인(仁)'이라 했다. 두 사상조류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학계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사상논쟁을 벌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거와 다르게 춘추전국시대의 주류 사상은 노자의 '자연'이었다. 반면 공자와 그를 따르는 유가들은 오히려 비주류였다. 유가는 인(仁)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가장 근원적인 성품이라 전제하고 이 인(仁)을 닦아 '나'에 적용하고 '집안'과 '국가'에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공자의 인(仁)은 무엇인가. 공자가 인(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어록에서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누군가 위험에 처하거나 불행을 당하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그 근원에는 인(仁)이 있다는 것이다. 인(仁)은 원래 행인(杏仁. 살구씨)을 말하는데 공자는 사람만이 가지는 근원적인 씨앗이 바로 살구씨와 같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그의 인(仁) 역시 임의성, 주관성, 비의성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자 자신조차 정의 내리지 못했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유학자들도 인(仁)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반면 노자는 공자처럼 인간 내면의 그 무엇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의 우주적 원리를 가지고 천하의 운영원리로 삼고자 했다. 이 세계가 움직이는 현상을 면밀히 관찰해서 보편적 원리를 찾고자 했다. 노자는 그의 도(道)를 이렇게 정의한다.
孔德之容, 唯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도(道)라는 것은 오직 눈부시고 어둑어둑하여 그 속에 상(象)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 만물의 근원을 찾는다."
독자들은 이게 무슨 정의냐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설명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 이렇게 밖에 설명하지 못했을까. 노자는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최대한 설명해 보고자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의 도(道)는 오늘날 'DATA'를 말한다. 이 때문에 노자뿐만 아니라 장자 역시 도(道)를 명시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그의 도가 실체를 드러냈지만 2천5백 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을 두고 좌절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통찰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나 새삼 실감케 한다. '공자의 인(仁)'을 공자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굳게 믿은 것처럼 공자의 인(仁)이나 노자의 도(道), 둘 다 당시로서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좀 더 흘러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유클리드 기하학은 이것을 증명하는 시작점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수학이 주목받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동아시아의 철학이 경험 철학에 머문 이유와 동일선상에 있다.
최진석 교수는 동아시아의 철학이 경험의 철학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의 철학이 경험의 세계에 갇혀서 철학의 발전이 더뎠고 그 결과 근대화도 늦었다고 설명한다. 서양의 철학이 사유의 철학이었다면 동아시아의 철학은 경험에서 나온 철학이라는 것이다. 사유의 철학이란 서양인들의 철학이 사유의 구조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매우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철학은 논리학과 수학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도 그 시작은 매우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철학이었다. 유클리드의 기하원론이 나오면서 비로소 그들의 철학에 수학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플라톤이 수학을 매우 중요시했지만 철학에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철학은 선진(先秦) 시기 제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만개한다. 직하학궁에서 순자(荀子)의 학맥을 이어받은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가 법가사상을 완성한다. 이들이 발견한 도는 '법(法)'이었다. 법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었다. 진(秦) 나라로 간 이사(李斯)는 여불위(呂不韋)의 천거로 진나라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얼마 안 있어 '법'을 통치모델로 삼은 진(秦)은 천하를 통일한다. 하지만 진나라는 가혹한 법으로 인해 15년 만에 멸망하고 이어서 한(漢)이 들어선다. 한나라 초기의 주류사상은 도가계열의 황로학(黃老學)이었다. 황로학은 형식적으로는 법가의 법치(法治)를 내세우면서도 도가의 무위(無爲)를 계승하여 민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엄격한 법은 무위를 위한 수단일 뿐 법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법은 인치(人治)를 극복하기 위한 견제 수단에 그쳐야 한다는 주장으로 전 왕조인 진나라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듯하다. 이런 기조에 힘입어 한나라 초기에 상당한 번영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5대 황제인 문제(文帝) 때부터 반전이 일어난다. 문제(文帝)는 BC167년 권농억말(勸農抑末) 정책을 시행한다. 이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가급적 자제했던 초기의 기조와 달리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중과세로 농업보다 불리하게 만든 반시장적 네거티브 정책이다. BC 143년에는 동중서(董仲舒)가 건의한 독존유술(獨尊儒術)을 무제(武帝)가 받아들이면서 유교가 국가통치이념으로 처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어서 오초 7국의 난을 계기로 군국제(郡國制)는 사실상 끝장나고, BC127년 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헌책에 따라 제후국의 봉지를 모든 자제에게 분봉(分封) 토록 하는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한다. 그전까지는 제후국이 적장자 1명에게만 승계되므로 각 제후국이 대대로 힘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으나, 이제 천자가 제후들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적장자는 물론 모든 자식들에게까지 영지를 나누게 되니 다음 세대가 되면 아들 수만큼 제후국이 잘게 쪼개지게 되어 더 이상 장안의 중앙정부에 대항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다. 중앙집권제의 확립이다. BC 167년 농본주의 천명 -> BC 143년 유학의 통치이념 채택 -> BC127년 중앙집권체체 확립,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사건으로, 그 전시기의 비의성, 주관성, 임의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모든 노력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다시 이전시대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역사의 반동이었다.
필자는 동아시아의 철학이 '경험'의 세계에 갇힌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가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면서부터 '문자'에 갇히게 되었다고 본다. '통일국가의 완성'은 지배층의 권력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과거에 자신의 국경을 넘보던 이웃 국가들이 이제 없어졌으니 더 이상 국경선 너머에서 오는 국가안보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직 내부에서 체제를 흔드는 요소만 제거하면 된다. 체제를 위협하는 내부의 소요를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중앙집권화'는 그들의 권력이 더 공고해진다는 뜻이다. 중앙집권화 된 통일국가의 지배층에게 현실 세계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지켜줄 유교적 '가치'가 중요하다. 경험의 세계에서 사유의 세계로 넘어가려던 마지막 순간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문자'에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문자'에 갇히면 경험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철학과 과학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데이터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도가철학은 경험에서 출발했고 그 속에서 원리를 추구했다. 물론 아무리 데이터가 많이 쌓이고 그 속에서 패턴을 발견한다 한들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자율성을 갖춘 사회는 무위의 덕으로 이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했을 것이다. 필자는 도가철학이 사상계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면 사유의 철학으로 분명히 넘어갔을 것으로 단언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유럽과 달리 단조로운 해안선을 가진 천원지방(天圓地方) 지형의 동아시아는 '통일제국'이라는 숙명을 안고 있었고, 거대한 제국을 일국체제로 유지하고자 했던 모든 왕조는 '중앙집권체제'의 유혹을 떨쳐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송대 주희(朱熹)조차 '문자'에 갇혀서 사유의 철학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사유가 빈곤한 유학이 불교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언듯 사유의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경험에서 얻어진 철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