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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Nov 26. 2023

무명(無名)

있는 그대로 보라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道는 항상 무명에 있다. 樸은 비록 보잘것없으나 누구도 부리지 못한다. 통치자가 만약 이 道를 지켜 천하를 다스린다면 만물은 장차 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다.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 而自均

천지상합     이강감로     민막지령     이자균

천지가 서로 합해서 감로가 내리고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절로 고르게 될 것이다.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可以不殆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지지가이불태

始에서 이름이 생기고 이름이 이미 있다면 유명 세계의 한계성을 깨달아서 장차 이름 짓는 행위를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칠 때를 알고 그치면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이것을 세상의 도에 비유한다면 마치 강과 바다에 흘러드는 계곡과도 같은 것이다. (제32장)


  14장에 이어 다시 유명(有名)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1장의 “무명은 세상의 시(始)와 같다 (無名 天地之始)”라는 문장에서 시(始)를 무명(無名)이라 했다. 그럼 시(始)가 무엇일까? 다음은 시(始)에 대한 최진석 교수의 설명이다.

 후한 때 허신(許愼:58경~147경)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시(始)는 여지초야(女之初也)라고 했다. ‘초(初)’는 옷을 지을 때 아녀자가 가위를 옷감에 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옷감을 마름질하기 위해 가위를 대고 있는 모습은 옷감을 자른 것도 아니고 아직 자르지 않은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를 포착한 것으로 초(初)라는 글자를 빌려서 시(始)를 말한 것이다.

이 始는 현재의 언어로 쓰면 우리 주변의 널리고 널린 "data"를 말한다. 정리하자면 初=始=無名=樸=data이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박(樸)이라는 글자는 다른 장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제재하지 않은 원목의 통나무”를 말한다. 樸雖小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명에 비해 무명은 보잘것없고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유명은 이름 지어서 누구나 손에 잡히니 모든 사람에게 고귀하게 여겨지는데 비해 무명은 이름도 없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으니 하찮아 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노자는 모두가 숭배하는 유명을 볼 게 아니라 정작 주목해서 봐야 할 거는 모두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무명이라고 역설한다.

우리 인간에게 유명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유명이 없으면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유명을 제거하라고 한 걸까. 유명이 데이터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짚어주기도 하지만 잘못짚어서 엉뚱한 곳을 헤매게 할 수도 있다. 노자도덕경의 키워드는 기-승-전-무명(無名)이고 이 무명을 보기 위해서는 유명을 덜어내고 비워내야 한다는데 전체 텍스트의 거의 전부를 할애하고 있을 정도다. 유명에 편향성이 있는 거는 분명 맞지만 노자가 이처럼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이 유명을 다스릴 적절한 방법이 없는 데서 오는 조바심도 약간 느껴진다. 심지어 이름 짓는 행위도 그치라고 한다. 유명은 사실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노자는 유명의 유용함보다 유명의 한계성과 부정적 면을 집중적으로 부각한 듯하다.



현재까지의 뇌과학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유명이 무명을 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직 명확하게 알려져 있는 건 없다. Chat GPT 3.0은 1,750억 개의 파라미터를 가진 엄청난 크기의 인공신경망(모델크기를 말할 때 파라미터 개수가 중요한 이유는 모델 크기의 99%는 파라미터이며 코드는 수백 줄에 불과하다)으로, 인터넷상의 45TB의 언어를 모두 학습하고 나니 이 녀석이 추론을 하고 예측을 하더라라는 것만 알고 있다. 코드를 이렇게 저렇게 좀 바꿔주고 파라미터 수를 좀 더 늘리고 하니까 점점 더 똑똑해지더라만 알고 있을 뿐 그 원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원리를 모르니 이렇게 저렇게 막 질러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좋은 w(가중치)를 찾는다는 수학적 보장이 없다. 원리는 모르지만 잘 된다고 한다. 학습한 것이 압축된 형태로 파라미터에 들어있는 건 아닌지 하는 추측만 있다. 이 녀석은 학습한 단어로 나름대로 이 세계에 대한 모형을 갖고 있는 듯하다.

AI는 언어를 벡터로 표현한다. 이 벡터는 100~1000차원의 숫자열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는 과일, 달콤함, 청송같이 사과를 설명하는 직접적인 단어 외에 뉴튼, 아담과 이브 같은 일화나 우화 같은 스토리에 인용되는 경우도 모두 이 차원으로 넣어주면 1000차원까지 갈 수 있다. 이 차원이 많을수록 모델의 정확도는 높아진다고 한다. 아마 차원이 많을수록 정교한 모형을 갖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세계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훨씬 디테일하고 복잡하다. 유명(有名)은 그중 한 프레임을 포착한 것뿐이다. 우리의 감각은 대략 70 fps정도인데 이걸로는 이 세계를 온전히 포착하기 어렵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좀 더 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온전히 보지는 못한다. 우리는 늘 참값이 아닌 근삿값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 짓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모형을 만든다 하더라도 오차는 상존하니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 철학 논고》에서 논리로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어온 서양 철학과 논리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진리함수의 정체는 다름 아닌 ‘NAND’, 다시 말해 NOT과 AND이다.

  알고 보니 ‘아, 세상은 일어나는 모든 것이고, 논리가 전부이며···’등 글을 써나가던 비트겐슈타인은 ‘그럼 논리의 핵심이 무엇일까?’에 다다른다. 그는 논리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명제들은 단 한 가지 논리함수 ‘NAND’들의 연결 고리로 설명할 수 있고, 이 낸드가 우주의 진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세상은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뭘까?’를 언어로 설명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표현할 수 있는 표현의 개수가 다르겠지만 대개 ‘포유류이다’, ‘포식성 동물이다’, ‘야행성이다’, ‘모래를 파낸 뒤 배변 후 배설물을 다시 덮어 흔적을 숨기는 습성이 있다’ 등 이 정도에서 막히고 더 쓸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양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래 봤자 100개를 넘길 수 있을까?

  왜 이럴까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만든 언어의 해상도가 세상의 해상도 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사물 또는 사건의 공통적인 패턴을 뽑아서 만든다. 만약 ‘고양이는 포유류다’라고 할 때 포유류는 젖을 먹는 동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어미의 젖을 먹는 동물은 고양이 말고도 개도 있고 사람도 있다. 젖을 먹는 동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포유류라는 단어만으로 고양이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른 개념으로 몇 개 더 보충 설명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설명하는데 언어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전체의 10%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럼 언어 말고 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있을까? 세상을 인식하는 생물은 동물과 식물 중 동물이다. 그리고 동물에게는 신경망이라는 뇌를 가지고 있다. 선충은 인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엄연히 300개가 넘는 뉴런을 가진 뇌가 있어서 벽에 부딪히면 몸을 뒤로 빼기도 하고 장애물을 피해 가기도 한다. 선충은 더듬이로 들어오는 세상의 모습을 나름 인식하고 있다.

  선충은 언어가 없는데 어떻게 세상을 인식할까? 바로 뉴런과 시냅스로 이루어진 신경망으로 세상을 본다. 신경망은 뉴런들이 층을 이루고 있고 층과 층 사이의 뉴런은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다. 고등 생물이든 하등 생물이든 뉴런의 개수와 층수만 다를 뿐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인간의 뉴런의 수는 870억 개에 달하고 층수는 10~15층 정도다. 개수와 층수가 많은 생물일수록 고등하다. 층수가 많을수록 추상적인 패턴을 인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신경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 다시 신경망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할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세상은 감각으로 들어오는 데이터를 쪼개서 숫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숫자가 입력되는 맨 아래층의 신경세포층은 픽셀 하나의 특징을 알아내고, 2층은 픽셀 네 개의 특징을 알아내고, 3층은  여덟 개의 특징을 알아낸다. 밑에 있는 세포층은 아주 디테일한 특징을 찾아내고 위로 갈수록 아주 거시적인 특징을 찾아낸다. 이런 식으로 맨 밑에 있는 층에서 보는 세상의 특징과 중간층에서 보는 세상 모두 숫자로 표현된다. 마지막으로 맨 위층에 도출되는 숫자가 비로소 언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맨 위층에 도출되는 숫자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촉’이라 부르기도 하고 ‘직감’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워런 버핏은 주식투자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주식투자를 잘하세요?’라고 물어보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10%의 언어로 대답할 것이다. 그가 쓴 책도 있을 것이다. 워런 버핏이 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면 워런 버핏같이 수익을 낼 수 있을까? 절대로 그 사람만큼 수익을 내지 못한다. 왜일까? 사실은 왜 수익이 나는지 정확한 이유를 워런 버핏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책에 없는 90%를 따라 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얘기다. 이 90%가 촉이자 노자가 말하는 무명이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장자》 「천도 편」에도 나온다.

『어느 날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대청마루 위에서 서책을 보고 있었다. 윤 편(輪扁)이라는 수레공이 마루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마루 위를 쳐다보며 환공에게 아뢰었다.

“감히 여쭈온데,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대왕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아마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환공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나 만드는 네놈이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만일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한다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자 윤편이 대답했다.

“제가 평소에 하는 일의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어디쯤에 정확한 치수가 있을 것입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로부터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 성인도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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