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들 사이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가 등장했다.
여자아이 2명, 남자아이 1명이 놀이하게 되었는데 한 여자아이가 집에 돌아가 자신은 그 역할을 하기 싫었고 너무 속상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역할인즉슨 똥개.
그 속상함을 느낀 여자아이의 엄마는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전달했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혹시나 놀이 안에서 친구가 하기 싫은 역할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거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겼지만, 그 놀이의 사건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왜냐하면 놀이의 남자아이는 우리 꼬마였기 때문이다.
속상함을 느낀 여자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속상했고, 다른 아이들이 억지로 놀이에 참여시켰다고 생각해서인지 아이들의 놀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지 않냐고 말했다.
또 다른 여자아이의 아빠 또한 아이들이 친구를 배제한 것은 잘못이라며 집으로 돌아가 혼을 내겠다며 그 속상한 여자아이의 엄마에게 사과를 전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많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가야 한다지만,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왜 사과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놀이 맥락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훈육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말을 듣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영화가 떠올랐다.
누가 괴물인가. 괴물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른들이 바라보고자 하는 대로 재단해 버리는 아이들의 세계.
아이들의 세계 안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어른들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어른에 의해 괴물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세계가 어찌나 안타깝고 슬펐는지 모른다. 이 영화를 놓고 성정체성에 대해 꽂힌 관객들도 많을 테지만, 나는 감독이 분명히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판단하지 않고 정의 내리지 않고 그저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나에게 이 괴물과 같은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아이들의 재미난 놀이가 어른들에 의해 전혀 다른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아이들은 너무나 즐겁게 역할놀이를 하며 놀았을 것이다. 그 안에 서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도 벌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속상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그 속상함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그것이 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으나, 그 모임 자리에서 그 황당함을 감출 길이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상함을 느낀 여자아이의 엄마는 며칠 뒤 나를 찾아왔다. 똥개 역할을 두 명의 아이가 회유하여 강요했다는 점, 그리고 똥개가 결국 그 세계 안에서 죽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똥개 역할을 우리 꼬마가 했다고 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떠한 죽음이었는지 알 수 없지않는가. 재미나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맥락일 수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놀이 안에서 다루는 죽음이 어른이 바라보는 잔인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죽음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자신들 내면에 존재하는 죽음이라는 불안을 놀이 안에서 꺼내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6. 7세의 아이들은 서로 안에서 놀이하며 자신을 조절해 보고, 함께 상상해 보는 창조의 기회를 얻는다. 그 기회의 귀한 놀이를 절대로 어른들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행선의 침묵이 느껴졌다.
얼마 뒤
나는 꼬마를 통해 이 놀이가 무슨 놀이였는지를 듣게 되었다.
"고양이 주인이 고양이가 아파서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 거야.
그런데 의사가 고양이용 젤리를 먹었어. 의사가 고양이가 되었다가, 똥강아지용 젤리를 먹어서 똥강아지가 되었어. 똥강아지가 어떤 사람한테 똥을 뿌지직 날려버려서 감옥에 갔대. 똥강아지가 나중에 차도가 인도인 줄 알고 누워있다가 차에 깔려서 납작해져 버렸대 "
속상했던 여자아이는 처음에 의사 역할로 시작했던 것이다. 의사를 하다가 젤리를 먹어 똥강아지가 되었고, 나중에 납작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꼬마는 고양이의 주인이었고, 여자아이는 의사였다. 하지만 놀다 보니 모두가 똥강아지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 역할의 분명함은 알 수 없으나, 꼬마는 젤리를 먹고 동물이 되는 지점과 납작해져 버린 지점에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했다.
" (손을 둥글게 만들고는) 이렇게 있었는데
(납작하게 손을 만들며) 이렇게 돼버렸던 거야 "
꼬마의 입을 통해 들은 죽음은 한 아이를 따돌리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아이
과연 아이들이 보고 느끼는 세계를 어른인 부모가 모두 알 수 있는가. 어른은 아이를 가르칠 수 있는 존재이기만 하는가. 어른만의 해석, 부모가 가진 생각들로 아이들의 놀이는 얼마나 괴물다운 모습이 되는가. 부모의 앞선 생각과 걱정들이 아이들이 직접 느끼고 보았던 아름답고 창조적인 순간을 해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