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무사유와 폭력의 얼굴

소설 『혼모노』 리뷰 | 성해나 지음 | 창비

by 데미안에너지

소설 『혼모노』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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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무사유-폭력성의 순환 구조


“진짜와 가짜.”

많은 리뷰가 성해나의 『혼모노』를 이렇게 읽는다. 늘 그렇듯 나는 조금 다르게 읽었다.

외로움.

사유의 중단.

그리고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미세한 폭력성.

작품 속 인물들은 결코 악하지 않다. 다만, 생각하기를 멈추었을 뿐이다. 사유하지 않는 마음은 타인을 해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잠식한다. 인물들은 이 또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곱 편의 결말은 기존 소설 기법과 다르다. 인물들이 사유를 멈추고 알 수 없는 상태니까 어떤 결론이 날 수 없다. 작가는 그 구조를 정밀하게 따른다.

외로움은 말해지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침묵하고,

그 침묵은 결국 폭력의 형태로 드러난다.

나는 『혼모노』에 수록된 일곱 개의 단편을 ‘외로움–무사유–폭력성’(순서는 작품마다 다르다.)이라는 시선으로 읽었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부는 파열음으로 가득한 이야기들. 그 균열의 틈에서 우리는 각자의 외로움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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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작품을 ‘무사유-외로움-폭력성’의 구조로 읽기


첫 번째,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무사유외로움비의도적 폭력)

김곤이라는 감독을 향한 ‘나’의 팬심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독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어디에든 속하고 싶다는 ‘나’의 외로움이 만든 감정의 대리 구조다. 실제로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이유가 없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팬심은 무사유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감독이 어린아이를 꼬집어 가면서 눈물 연기를 하게 만들었다는 논란이 터졌을 때, ‘나’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도덕적 판단을 중단한 채 무사유의 옹호만 반복하며 팬덤에 잔류한다.

하지만 길티 클럽에서 ‘나’는 김곤의 팬덤에 속하지 못하고 겉돈다. ‘나’는 길티 클럽에서 외로움을 느끼지만, 끝까지 김곤의 팬으로 남으려 한다. GV에서 직접 마주한 김곤은 논란을 인정하면서 깊이 사죄한다. 수많은 시간을 김곤을 옹호하며 보냈던 ‘나’는 감정적 균열을 한순간에 드러내며 김곤에 대한 마음이 식는다.

이 작품에서 폭력성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해치는 방식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거짓된 감정을 계속 강요해 온 자기 파괴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무사유와 외로움으로 지탱되던 팬덤이라는 안전지대가 무너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자기 감정이 얼마나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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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스무드(외로움무사유상징적 폭력)

‘스무드’는 제프라는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다. ‘나’=듀이는 제프의 매니저로 한국 전시회에 동행하게 되면서 한국에 처음 방문한다. 듀이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삶의 방식과 감각, 사고 구조 모두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듀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도 업무 때문이지 자신의 정체성이나 뿌리 찾기 같은 정서적 서사는 없다.

듀이에게 한국은 하나의 관찰 가능한 풍경이자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타자적 공간이다. 그러다 잠시 산책을 하게 된 듀이는 휴대전화 배터리가 5%밖에 남지 않게 되어 태극기와 성조기로 가득한 무리 사이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이승만 광장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대부분 노인들이다. 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과거 군사정권과 반공 서사를 기반으로 한 정서적 연대를 반복하는 집단이다.

듀이는 이들의 과거 정치사의 맥락, 한국 현대사의 좌표, 한국의 역사와 자신의 정체성 등에는 관심 없다. 노인들의 살가운 친절은 듀이의 내면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건드린다. 이들의 환대에 듀이는 이상한 친밀감과 잠깐의 소속감을 느낀다. 그저 ‘나를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정서적 연대를 경험하고 그 속에 편입된다.

듀이에게 도시락도 주고 배터리도 충전해 주면서 친절을 베푼 노인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자식들과 말도 섞지 않는다. 듀이와 아버지의 관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모인 무리는 모두 외로움과 무사유의 연대다. 그들은 잘못된 역사관을 그대로 믿고 있지만, 그곳에서는 외롭지 않다. 듀이를 챙겨준 노인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면서 이승만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선물하고, 듀이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합쳐진 배지를 산다. 듀이는 사유 없는 선택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폭력성을 옷에 달고 제프를 만나러 간다.

기념품을 구매한 듀이의 행위 자체에는 어떤 폭력성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유 없이 선택된 상징물이 어떤 의도를 향해 작동할지 모르는 잉여적 폭력성을 고민해야 한다. 잉여적 폭력성은 듀이의 내면에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무사유와 외로움이 결합된 결과로 상징적 폭력이 외부로 미끄러지는 형태다.

공항에서 제프를 만난 듀이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였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사유 부재의 달콤함이 가진 위험성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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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혼모노(외로움폭력성무사유(진정성의 착각))

30년 박수무당 문수는 신이 자신을 떠나자 참혹한 외로움과 마주한다. 앞집으로 이사 온 신애기에게 옮겨간 신 할멈을 원망하면서 신애기를 경쟁상대로 인식한다. 문수의 도움으로 의원이 되었던 황보의 배신도 문수를 외롭게 만든다. 이 외로움은 무당이라는 정체성을 붕괴시킨다. 자기가 모셨던 할멈이(일본어도 쓴다.) 진짜였는지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신애기가 황보를 위해 벌이는 굿판에 맨몸으로 뛰어든 문수는 자기 파괴적인 폭력성으로 가짜를 몰아내려고 한다. 문수의 폭력성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담보로 삼는다. 칼로 얼굴을 베고 작두에 올라선다. 신애기와 경쟁하듯 피를 부른다.

문수는 피를 흘리면서도 자기의 상처를 인지하지 못한다. 정신과 신체 사이의 감각이 단절된 상태로 치닫는다. 신을 향한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문수의 극단적 무사유는 경악을 넘어 공포를 불러온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나 소리는 잊은 채 자기 안에 갇힌다.

문수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진짜 굿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소모하여 진정성을 입증하려는 비극적 강박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문수를 떠난 할멈이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마지막 문장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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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무사유폭력성(구조적 폭력성)외로움)

여재화는 친일의 잔재, 군부 독재를 위해 자기의 재능을 악의 평범성에 끼워 맞추며 고문실을 설계한다. 평소 인정하지 않던 제자 구보승을 입이 무겁고 나중에 탈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를 가지고 조수로 채용한다. 군부 대통령의 안가와 고문실을 설계하는 것 자체가 폭력성에 발을 담근 것이지만 여재화는 자기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다. 제자 구보승이 3층 고문실을 철저하게 피해자들의 희망을 꺾는 곳으로 설계하자 화를 낸다. 하지만 여재화 자체가 설계하는 모든 공간이 어떤 고통을 생산하는지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구보승의 설계에는 화를 낸다?

구보승이 설계한 3층 고문실은 사람을 지우는 행위다. 폭력성의 건축적 구현인 것이다. 여재화는 훗날 정초석(定礎석石)에 구보승의 이름을 올리고 자신은 발을 뺀다. 폭력이 어떤 식으로 사유 없는 책임을 끝없이 전가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고문실을 설계하는 구보승의 광기도 사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피해자들을 삭제하기 위한 위험한 폭력적 사유였다.

“인간을 위한 공간이긴 하니까요.”

구보승이 여재화에게 한 말이 얼마나 끔찍한 무사유고 무감각의 위험성을 갖는지 인지해야만 한다. 무사유가 악의 뿌리가 되는 과정을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느끼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공포로 변한다.

여재화는 자신이 한 일을 숨겨서 평범한 교수로 출세하여 독재시대를 잘 살았을 것이고, 그의 인간성은 국가 폭력 안에서 폐허가 된 상태였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뒤, 구보승은 공인중개사가 되어 정초석에 적힌 자기 이름을 찾아온다. 여기서 더 공포스러운 것은 그가 정초석에 새겨진 자기 이름을 쓰다듬으면서 후회를 하거나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구보승도 어떤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찰을 통해 자신이 어떤 쓰임이었는지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폐허가 된 경동수련원(고문실)처럼 남게 되었다.

구보승이 마지막에 느낀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적 폐허가 연민이 아닌 공포로 남는 이유는 사유하지 않은 가해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재화와 구보승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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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우호적 감정(외로움무사유폭력성(관계 파열))

맥스가 대표로 있는 스타트업 회사는 닉네임 문화, 표면적 평등 관계를 지향하지만 실제 맥스의 행동은 말과 다르다. 권위적인 회사 분위기를 유지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가려둔 채 지낸다.

‘나’는 누구와도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우호성은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가 아니라 외로움을 피하려는 방어적 성향에 가깝다. 수진과 진 사이에서 ‘나’는 우호적인 상태로 지낸다.

어느 날, 회사 임직원의 상여금이 사원의 실수로 공개되면서 진과 수진의 관계가 껄끄러워진다. 수진은 맥스와 함께 회사를 창업할 때부터 있었던 사람이고 진은 대기업에서 스카우트한 사람이다. 그런데 진이 수진보다 더 높은 상여금을 받았고, 수진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진이 프로젝트에서 일방적으로 수직적 관계를 발설했기 때문이다. 권도우에게 자신을 부장, 수진을 과장, ‘나’를 사원으로 부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누적된 무사유적 친절과 회피가 빚은 구조적 폭력성은 수진의 잘못이 아니라 맥스가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수진은 피해자일 뿐이다.

수진은 용기 내어 진실을 말하고 퇴사한다. ‘나’에게는 “너무 애쓰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맥스가 유명한 딤섬집에서 회식을 하지만 겉으로만 우호적인 분위기를 ‘나’는 감지한다. ‘나’가 뜨거운 딤섬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머금고 있는 장면은 갈등을 두려워한 사람이 결국 관계의 폭력 한가운데 고립되는 장면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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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잉태기(폭력성외로움무사유)

‘나’와 시부의 관계는 누가 더 딸(혹은 손녀)을 소유하는가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폭력 구조다. 신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양육, 보호, 배려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감정적 폭력이다. ‘나’와 시부는 서로 몰아붙이고 부딪치면서도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인생 자체가 무지의 폭력으로 점철된 두 사람이 온전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을까?

딸 서진의 원정 출산을 위해 공항에서 마주한 ‘나’와 시부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감정이 축적된 끝에 생긴 외로운 충돌이다. 외로움이 크면 클수록 서진에 대한 소유욕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나’와 시부는 서진의 양수가 터진 것도 모른 채 서로의 감정적 밀실에 갇혀버린다. 서진을 사랑한다는 말로 과잉보호와 무책임, 무분별과 물질만능적 삶을 물려준 두 사람은 서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무사유를 느낄 뿐이다.

잉태는 서진이 아이를 출생하는 것도, 생명의 탄생을 은유하는 것도 아니다. 성숙하지 못한 ‘나’와 시부의 무사유가 세대를 따라 이어지는 계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무사유의 대물림이 어떤 끔찍한 폭력으로 이어지는지 알려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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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메탈(외로움폭력성무사유)

우림, 시우, 조현은 메탈을 사랑하는 고등학생이다. 대중적 취향 바깥에서 존재하는 데 익숙한 아이들은 외롭다. 겉으로 보기에는 반항하는 청소년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외로움의 진폭이 커서 음악을 통해 버티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조금씩 균열이 시작된다. 학업, 진로, 오해, 자존심이 겹겹이 쌓여 우림과 조현 사이의 감정이 부딪힌다. 그들의 폭력성을 관계에서 오는 싸움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 속에는 관계를 끊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정의 파국이 담겨 있다. 외로움이 그들을 모았지만 폭력과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제대한 세 사람은 다시 만나지만 우림과 조현은 다시 싸우게 되고, 메탈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우림은 아지트를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우림의 행동은 끝내 성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무사유와 애정의 잔여물이다. 관계는 끊어졌지만 그들이 공유했던 외로움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외로움도 무사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감정에 휘둘리는 삶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우림이 조현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마지막 장면은 우림은 외로워서 사유하지 않고 감정적 대응으로 나가는 중이고, 그들의 관계는 결국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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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들


『혼모노』 속 작품들을 따라가며 나는, 인물들이 겪는 외로움과 무사유,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잔여적 폭력성을 봤다. 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연쇄는 소설 속 누군가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패턴에 가깝다.

사유를 멈춘 채 살아가는 순간,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외로움이 폭력으로 번지는 줄도 모르는 순간.

이 모든 장면에서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과 서사의 구조가 기존 결말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잊은 채 살아가는 나의 무사유적 폭력은 없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다양한 형태의 무사유, 외로움, 폭력성은 인간이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무늬에 가깝다. 무늬는 흔적을 남기고 인간은 결과를 맞닥뜨려야 한다. 『혼모노』 속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닮아있고, 진짜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사유하고 홀로서고 타인과 함께 걸어갈 것을 요구한다.

다만 외국어 활용이 세태를 반영하는 기법일 수는 있지만, 언어가 작가의 결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단단한 호흡과 밀도가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언어를 얼마나 벼려서 썼는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인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가진 미학적 방향 때문일 수도 있다. 세밀한 서정성으로 서사를 끌고 나가는 김연수 작가나 정제된 문장의 진동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한강 작가의 문체에 익숙한 독자여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니 언어 부분에서 다듬어지고 벼려진 작가의 글이 어떤 잠재력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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