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폭풍의 언덕』 리뷰 | 에밀리 브론테 지음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지음 | 황유원 옮김 | 1, 2권 합본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1 | 총586쪽(1850년 편집자 서문, 해설 포함) | 1판3쇄 발행일 2025년 2월 10일
---
---
『폭풍의 언덕』의 원제목은 ‘Wuthering Heights’(워더링 하이츠)다. 한국어 제목은 일본어판 제목 『嵐が丘』의 영향을 받은 번역이다. 하지만 원제는 ‘폭풍의 언덕’보다 더 구체적인 질감을 품고 있다.
Wuthering에는 단순한 폭풍이 아니라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집과 몸을 흔드는 소리가 배어 있고, Heights에는 낭만적인 언덕보다 고립된 고지대의 저택과 황야의 감각을 드러낸다. 히스클리프heath라는 이름도 인상적이다. heath는 황무지에 피는 꽃을, cliff는 절벽을 뜻한다. 이 작품은 제목과 이름부터 거친 환경, 고립, 절벽과 같은 위험, 황량함이 인간의 본성과 맞닿아 있음을 알려준다.
게다가 작품 속 배경인 18~19세기 영국은 가족, 혼인, 상속이 강하게 얽힌 사회였고, 가부장제의 구조도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광기 어린 사랑, 혹은 파괴적인 인물들의 파멸로 정리하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들은 어렸고 보호받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이 작품은 록우드의 바깥 시선과 넬리 딘의 회고가 겹치는 독특한 구조다. 서술자가 모두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물들의 심리를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넬리의 가치판단이 강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악마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아무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내면을 알 수 없다. 넬리가 평가한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잣대가 가득한 회고이기 때문에 나는 서술자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었다.
또한 18~19세기 영국의 대저택과 상류 가정에서 하인 체계는 분명 위계적이었지만, 동시에 집안 운영은 집사·가정부·하우스키퍼 같은 상급 하인들의 실무 권한에 크게 의존했다고 한다. 특히 housekeeper는 단순히 시중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집안 운영의 핵심 관리직이기도 했다. 넬리는 그런 위치에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은 악인의 본모습이라기보다 이미 해석되고 정리된 초상에 가까웠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내가 거부하게 된 것은 두 인물의 폭력성 자체보다 그들을 손쉽게 악마의 자리에 올려놓고 서사가 진행되는 독해였다.
---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파괴적인 행동은 제대로 된 돌봄과 훈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한 개인이 아니라 어른의 부재가 인물들을 거칠고 유아적으로 만들었다. 작품에는 자기성찰로 집안을 이끄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온건하고 자비로운 인물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타인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며 감당하지 못하고, 상처를 돌봄으로 바꾸는 법을 알지 못한다.
훈육과 사랑을 받지 못한 인물들은 모두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당연히 감정조절은 할 줄도 모른다. 잘못된 감정의 해소는 소유욕, 질투, 통제, 복수, 폭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 속 인물들은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권력만 손에 쥔 아이들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타고난 괴물이 아니다. 그들은 어른 없는 집, 미성숙한 권력만 난무하는 환경이 길러낸 증상에 가깝다.
넬리가 록우드에게 당시 상황을 전할 때 자기가 어떤 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지 나오는데 넬리도 성찰한 어른은 아니다.
영화 《어른 김장하》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래도 한국에는 진정한 어른이 시대마다 존재하고 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는가. 나이만 어른인 것은 아닌가. 늙어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이 듦에 대한 사유를 깊어지게 만든 작품이다.
---
18~19세기 작품이니 계급의 문제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내게 강하게 다가온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질긴 ‘가부장제의 폭력’이었다. 당시 영국은 결혼한 여성의 법적, 재산적 권리가 남편에게 흡수되는 질서가 강했고, 여성의 재산권이 본격적으로 확장된 시기는 1882년 이후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도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통제와 소유, 배제와 상속의 장치처럼 작동한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 누가 누구의 삶을 결정하는지,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지가 집 안의 공기처럼 스며 있다. 권력은 약자를 향할 때 더욱더 폭력적으로 바뀐다.
워더링 하이츠의 옛 주인이자 힌들리와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가 리버풀 길거리에서 데려온 고아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면서 힌들리의 마음에 시기와 혐오, 증오를 유산으로 남겼다. 힌들리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히스클리프를 학대하고,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과 자기의 아들 린턴을 학대한다.
넬리의 시선에는 당시 영국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잣대와 가부장제, 계급적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어릴 때부터 그런 구조에 적응하지 못했고 강인한 히스처럼 황무지를 뛰어다녔다. 구조 안에서 생명력 있는 아이가 아니라 버릇없고 악마적인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성격적 결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부장제 폭력이 집 안에서 어떻게 상속되고 변형되고 재생산되며 세대를 따라 가계도처럼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처럼 읽힌다. 이 가계도가 단순히 혈통의 계보가 아니라 행동 방식, 지배 방식, 사랑을 소유물로 착각하는 방식, 상처 입은 사람이 다시 타인을 상처 입히는 방식의 계보라는 점이다.
지금도 가부장제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도 평등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역사의 느린 발전은 지속되리라 믿어본다.
---
이 작품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유아적이고 야생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크셔 지방의 황무지에 부는 바람처럼.
나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보면서 이 죽일 놈의 사랑이나 격정적인 사랑으로 낭만화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넬리처럼 그들을 악마라고 할 수도 없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가부장제 폭력이 증상으로 남은 존재이다. 이들의 사랑은 한 집안의 폭력이 한 사람의 성격을 구조적으로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장치이다. 히스클리프는 가부장적 폭력이 그의 몸을 통과한 결과물이이고, 캐서린은 자기 욕망을 자기 것으로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증상만 남은 인물이다.
사랑을 사랑으로 배운 적 없는 세계,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기보다 지배와 소유로 되돌려주는 세계, 자기 욕망을 자기 것으로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세계가 그들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이해한다는 것은 폭력의 발생지를 개인의 본성 바깥에서 찾는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폭풍의 언덕』의 비극은 악마 같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다. 한 집안의 폭력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 그 안에서 자라는 사람들조차 그것을 삶의 언어로 오해하게 된다는 데 있다.
---
『폭풍의 언덕』은 영화로도 재생산되는 작품이다. 영화에서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 ‘이 미친 사랑’이나 ‘이 죽일 놈의 사랑’으로 연출하며 1세대 이야기에서 마무리된다. 히스클리프, 캐서린, 힌들리, 에드거 축에서는 사랑도 소유로 변하고, 상처도 복수로 되돌아온다. 집은 돌봄이 아니라 지배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2세대 이야기와 히스클리프의 죽음에 주제가 담긴다. 인류사에서 전쟁처럼 사라지지 않던 가부장제의 폭력이 어떤 식으로 약화 되는지 보여주는 2권의 내용이 핵심이다.
젊은 세대가 그 폭력의 문법을 완전히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은 가부장제 폭력의 가계도 바깥으로 깨끗하게 탈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 세대처럼 상처를 곧장 복수와 소유로 번역하지는 않는다. 에드거와 캐서린의 딸 캐시는 히스클리프와 이저벨라의 아들 린턴을 간호하고 돌본다. 캐시는 에드거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란 아이다. 또한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이 히스클리프처럼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대를 받으며 자랐지만 내면에는 엄마 프린시스 언쇼의 심성이 남아 있었다.
그 미세한 차이, 그 미세한 어긋남이 내게는 이 작품의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읽은 『폭풍의 언덕』은 가부장제 폭력이 상속되는 세계 속에서도 다음 세대가 다른 삶의 언어를 배워 가는 소설이었다.
캐시와 헤어턴은 관계를 다시 배우려 노력한다. 가부장제의 폭력이 유전처럼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미세한 이탈과 진화를 보여주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폭력의 상속을 완전히 끊지는 못해도,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감당하려는 데 미래가 있다.
역사를 더듬어 봐도 그렇다. 역사는 폭력이 얼마나 집요하게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의 상처를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고 역사의 방향을 아주 조금씩 바꾸어 왔다.
『폭풍의 언덕』은 가부장제 폭력의 가계도를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계보의 미세한 균열까지 포착한다. 폭력의 상속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더 이상 유일한 언어가 아니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은 영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에밀리브론데 #폭풍의언덕 #워더링하이츠 #고전명작 #고전소설 #영국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