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묻고 자랑처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초판본 -「별 헤는 밤」과「흰 그림자」

by 데미안에너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초판본, 열아홉 번째 시

19별헤는밤1.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19별헤는밤2.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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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시간들


고흐 작품 가운데 ‘별이 빛나는 밤에’를 좋아했다. 그런데 2016년 《반 고흐 인사이드 (빛과 음악의 축제)》에 다녀와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조그만 그림을 구매까지 했으니!!

전시회에서 고흐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기 프레임 안으로 세상을 끌어당기는 시각이 독특하고 슬펐다. 고흐에게 별빛이 다가오는 속도는 우리와 달랐다. 전시회 공간에 앉아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면서 고흐의 고독과 함께 그가 가지고 있던 따뜻함을 느꼈다. 어떤 사조로 설명할 수 없는 고흐의 동경이 느껴진 것인지 내 영혼이 조금 더 성장한 것인지—언제나 후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함!^^— 잘 모르겠지만 내 시선이 옮겨간 건 확실하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고 내 지식 안에서 떠오른 건 고흐의 그림이었다. 어떤 음악이나 다른 미술작품, 문학작품이 아니라 단 하나 고흐의 그림이었다. 고흐 그림 속에 떠 있는 별들과 이 시 속에 입체화로 뜬 별이 왠지 닮았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시인은 ‘별’을 소중한 생명 하나하나로 인식한 게 아닐까? 고흐의 그림에서도 많은 별들이 서로 원을 이루며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인다. 소중한 ‘별’들이 인생을 살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언덕에 풀이 무성할 것’이라고 그렇게 소중한 생명들을 헤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조국도 빼앗겼으니 얼마나 멀리 있었을까! 인간은 자기의 자아를 찾기 위해 먼 길을 간다. 자기를 찾는 여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린 왕자’를 만나듯 별을 보며 고흐도 윤동주 시인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일이 무척이나 힘든 현대 사회에서 고요히 ‘별을 헤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내면의 자아에게 ‘별 하나’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나누었다. 그 감정을 모두 경험하고 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경험을 하고도 자기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다양한 감정을 한 가지의 감정으로만 표현하는 현대 사회는 그래서 병들어 간다.

그러니 ‘별’을 헤아린다면 그 순간만큼은 별에 집중할 수 있다. 자기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별이 될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자랑처럼 무성한 풀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 자랄 것이라는 마지막 연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딘가에 별이 되어 있을 시인을 그리며 하늘에서 고흐와 시인과 어린 왕자를 찾아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초판본, 스무 번째 시

20흰그림자.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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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에서 나를 돌려보낸다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라는 시인의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현재에,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총명한지 묻고 싶다.

시인은 ‘괴로워하던 수많은’ 자신을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흰 그림자’만 남는다고 했다. 왜 하얀색 그림자일까? ‘황혼이 짙어지는’ 시간에만 자신의 흰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는 슬프지만 따뜻하고 고독하지만 의지가 느껴진다. 시인이 ‘황혼’을 보며 사색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떤 날 썼던 단상이 있다. 일기라 해도 좋겠다.

―태양(떠오르는 해)는 주변을 보듬으며 오르지 않는다. 자신의 힘을 강렬하게 비춰 주위를 빛으로 반짝이게 만든다. 그래서 태양은 내가 마주 볼 수 없다.
반면에 노을(지는 해)는 내가 마주 볼 수 있게 허락한다. 주변을 오묘한 색으로 물들이지만 조화를 이룬다. 그러고 나서 빠른 속도로 자신을 숨긴다. 끝까지 주변을 보듬고 포용하면서! 늙고 지친 인생, 가는 인생을 노을에 비유하는 말들이 많지만 나는 지는 해가 좋다. 내가 따스한 사람이 못 되어서 그런지 포근한 빛으로 주위를 감싸고 사위어가는 지는 해가 나는 좋다. 나를 위로하는, 빛이!


윤동주 시인이 흰 그림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황혼의 힘이 아니었을까? 분명히 나보다 훨씬 깊은 사색으로 황혼을 바라봤겠지만, 비슷한 면을 나도 느꼈던 것 같다. 다만 이런 엄청난 진리를 윤동주 시인은 25세 때 깨달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오랫동안 괴로워했던 수많은 자신을 제고장으로 돌려보내고 나서야 시인의 그림자는 흰색이 된 것이다. 검은 그림자 색깔을 흰색으로 돌려놓기 위해 부끄럽고 괴로웠던 자기 내면을 떼어내는 과정을 되풀이한 후에 드디어 ‘황혼이 짙어질 때’ 흰색을 만났다.

윤동주 시인이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우물’, ‘황혼’, ‘하늘’, ‘길’ 등을 찾아 움직인다. 하지만 시인은 ‘황혼처럼 물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의젓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검은색 그림자를 떼어내 준 ‘황혼’이 ‘자신의 방’까지 물들이면 좋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겠다. 어렵고 고통스럽게 깨달은 흰 그림자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흰 그림자가 시대적으로 우리 민족일 수도, 시인의 어머니일 수도 그 어떤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시인의 진정한 자아로 생각할 것이다. 검은 그림자를 떼어내고 진정한 자신의 ‘흰 그림자’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던 ‘황혼’의 색깔과 에너지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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