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도서 『그리스인 조르바』리뷰 |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by 데미안에너지

『그리스인 조르바』 리뷰 내용, 6컷으로 미리보기!

“AI생성 이미지입니다.”

---

고전을 읽는 태도


고전 작품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범하는 오류가 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시대적 잣대로 고전 작품 속 상황과 인물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역사적 환경을 고려해야 인물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한 후에 비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책을 읽을 때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 잣대로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불편하고 짜증나서 못 읽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선행하지 않으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책을 읽으면 논란이라는 말로 잘못된 시선을 갖게 된다. ―논란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의 잣대로만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만. 이것을 개인의 취향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주제 이해 없는 감상과 비난은 오류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는 얘기인가, 『달과 6펜스』에서 찰스 스트릭랜드는 가정을 버린 죽일 인간이 되고 만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마찬가지다. 조르바가 왜 자유인인가. 무식한 노동자에다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인간인데, 어디에 자유가 있다는 말인가.

시대적 배경, 작가가 살았던 시대, 작품 속 시공간적 배경,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는 주제를 먼저 파악한 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야 한다. 한국 고전 작품을 읽을 때도 우리 역사를 알고 읽어야 독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 고전 작품은(다른 모든 텍스트도) 이해가 먼저, 감상은 그다음이다. 21세기에도 혐오가 난무하고 고전 작품 속 인물들보다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작품 속 인물을 현재의 도덕적 잣대로 말도 안 된다며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독서가 아니다.

고전 작품들 특히 명작에 속하는 작품들은 시대를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들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소설이다. 소설에는 언제나 서술자가 등장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서술자의 기준에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조르바가 보스라고 부르는 ‘나’는 주인공이자 서술자다. 그의 입장에서 조르바는 분명히 자유인이 맞다.

자, 그러면 우리가 볼 때도 조르바는 자유인이 맞는가? 그것은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작가가 조르바를 자유인이라고 말한 근거를 작품을 통해 사색하면 알 수 있다. 또한 자유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먼저다. 작가는 조르바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보았다. 그것은 육체적인 자유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조르바의 영혼이 자유로운 상태였고, 죽음까지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봤을 때.

---

그리스 역사 위에 조르바가 있다


검색만 해 보아도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작품을 읽어야 오독(誤讀)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는 에게 문명(기원전 3650년경)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기원전 1200년경~900년경까지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미케네 문명은 멸망한다.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화로 전승되었다. 기원전 900년경~700년경 폴리스들이 등장했다. 기원전 5세기~323년까지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을 형성하고 그리스는 그에 편입됐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분열되고,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후,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긴 시간을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21~1829년까지 치열한 독립전쟁을 통해 그리스 국가로 독립했다.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그리스라는 나라를 찾은 그리스인들의 내면에 어떤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짧게 요약된 그리스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생략되었을까. 그런 역사 속에서 살아보지 않았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떻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

작가와 시대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년~1957년)가 그리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역사와 함께 여러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작품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강 작가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소년이 온다』나 『채식주의자』 같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시대적 환경(시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적 한계를 지닌 인간은 죽음을 맞는 존재다.

따라서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체로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는 빅 히스토리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편협한 잣대로 고전 작품을 비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이 19세기~20세기를 산 작가보다 편협하면 창피한 일 아닌가.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비난이 아니라 배울 점을 찾아서 현재 자기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인간의 삶은 과거에 빚만 지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다. 그때 조르바가 하는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이 온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

‘나’와 조르바라는 존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것은 서술자 닉의 관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에 개츠비 같은 존재가 없을까? 아니면 그 당시나 지금도 개츠비 같은 존재는 희귀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작품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명작이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서술자 ‘나’의 시선에서 조르바는 자유인이 맞다. 인생을 책으로 사는 ‘나’가 온몸으로 인생을 사는 조르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지혜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조르바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려고 노력한다면 개츠비가 위대하고, 조르바가 자유인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조르바의 보편성을 찾아서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에는 알렉시티미아에 걸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선재와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드러내는 곤이가 등장한다. 감정의 극단을 표현하는 두 사람을 통해 우리 안에는 선재와 곤이가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서술자 ‘나’와 조르바도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서양사를 지배해온 이성 강조와 종교적 인물로 ‘나’를,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인물로 조르바를 극단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만 반대로 감성만 존재한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인간이 된다. 관념과 형이상학이 필요한 것처럼 육체와 노동, 물질도 마찬가지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인간의 뇌도 좌뇌와 우뇌가 동시에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좌뇌형 인간이나 우뇌형 인간, 아침형 인간이나 저녁형 인간, 이과와 문과 등으로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인간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없다. 이과적인 부분과 문과적인 부분 모두 중요하고, 육체와 마음 둘 다 건강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선재와 곤이, ‘나’와 조르바처럼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나’가 붓다에 대한 책을 집필하게 했고, 노동하는 조르바를 무시하지 않고 그의 지혜를 배우는 자로 설정했다. ‘나’의 친구 스타브리다키스도 ‘나’를 공부만 하는 책벌레라고 부를 정도로 실천하지 않고 머리로만 사는 지식인의 삶을 비판했다. 그래서 ‘나’가 갈탄 광산 사장이 된 것이기도 하지만.

서양은 지나치게 이성과 종교적 교리를 강조한 나머지 육체와 감성, 인간의 자유를 억압했다. 억압하면 터지게 되어 있다. 공존과 조화가 아닌 억압은 반드시 부작용을 크게 발생시킨다. 억압은 폭력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인류사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폭력은 쉬운 길이지만 회복에는 막대한 대가가 따른다. 반면 조화와 공존은 어려운 길이지만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

조르바의 현재성


조르바가 거침없이 뱉는 말을 보면서 무례하다고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무례하지 않다. 스스로 요리를 해서 보스까지 먹인다. 자기의 일에 초집중한다. 오직 현재 자기가 있는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산다.

이 작품을 보면서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조르바가 ‘나’와 나누는 대화 속에, 조르바의 행동에 톨스토이가 말한 진리가 들어 있었다. 왕이 현자에게 물었고 현자가 답하는 대화다.

<왕의 질문>
“언제 일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어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인가?”
<현자의 답>
“지금 이 순간.” 오직 현재만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소명이다.

한동안 내 좌우명이기도 했던 세 가지 질문과 답이다. 그러니 조르바를 보면서 당연히 그는 현재를 인식하는 사람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다. ‘붓다(산스크리트어)’에 심취해 있던 ‘나’가 조르바가 ‘깨달음을 얻은 자=붓다(불타)’라는 사실을 놓칠 리 없다. 깨달음이란 머리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온 마음과 세포로 온다. 그러니 깨달은 자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바보 이반, 모모, 어린 왕자, 갈매기 조나단 등 고전 명작에서 수많은 인물이 깨달은 자의 면모를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깨달은 자가 신처럼 완벽한 자는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완벽하지 않다. 깨달은 자는 신이 아니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 부처가 된다. 그리고 깨달음은 매 순간 온다. 대부분의 우리는 매 순간의 깨달음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니 깨달은 자라도 수많은 실수를 한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자기의 잘못을 나중에라도 깨닫고 인정하는 태도, 처음 잘못한 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려는 태도, 쉬운 길만 찾는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찾고 지키려는 태도, 삶을 포용하되 불의에는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내는 태도. 깨달은 자는 완벽하지 않지만 오직 자기 삶을 통해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자다. 조르바는 자기 인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한 자다. 매 순간을 그렇게 사는 자다. 죽음조차도. ‘나’가 살지 못하는 삶을 조르바는 매 순간 산다. 그래서 ‘나’가 조르바와 함께 있을 때는 인생을 머리로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삶과 죽음이라는 두 길을 걷다


조르바는 ‘나’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사유 거리를 던진다.

“어느 날 내가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어요. 아흔 살 먹은 고루한 영감탱이 하나가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습디다. ‘저기요, 할아버지.’ 내가 물었죠. ‘정말로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신 건가요?’ 그러자 허리가 땅속으로 기어 들어갈 것 같은 그 영감탱이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죠.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 보스 양반, 이 두 사람 중 누구 말이 더 맞을까요?”
조르바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딱 걸려들었구먼! 어디 대답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갈래 길 모두 똑같이 기분이 좋으면서도 험난하기 때문이다. 두 길 모두 정상으로 이어진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순간순간 죽음을 염두에 두며 행동하는 것 ― 어쩌면 이 두 갈래 길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본문 70~71쪽(민음사)

이 대화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다. ‘나’가 말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 두 갈래 길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르바는 그 중에서 삶 쪽에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붙잡아라. 또는 현재를 즐겨라.)적 삶을 산다. 철저하게.

부처나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의미를 찾아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 대화에는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를 말하는 부분이 많다.

“난 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맡겨 버립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몸을 뻗어 내가 씨름하는 돌이나 갈탄을 ― 아니면 산투리를 말이오. ― 정복하려고 나 자신을 확장시킵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나를 갑자기 건드리거나 말을 걸어서 뒤를 돌아보게 만들면 난 두 쪽으로 쪼개지고 말아요.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겠소!”
― 본문 206쪽 조르바의 말(민음사)

—-

집중하는 관계=지금 함께 있는 사람


조르바가 ‘나’에게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장군들이나 남자들은 그 여자를 대할 때 머릿속으로 딴 생각들을 하지만 자기는 오직 자기와 함께 있는 여자에게만 집중하고 충실하다고. 다른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직 그 순간 그 여자에게만 자신을 온전히 던진다고. 그것을 카사노바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카사노바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여자들이 몰랐을까? 여자들의 직관은 뛰어나다. 모를 리 없다. 자기와 같이 있는 이 남자가 헤어지기 전까지 자기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다. 조르바는 오르탕스와 함께 있을 때는 오직 오르탕스만 생각한다. 다른 것은 의미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오르탕스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는다.

물론 여러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했다가 도망치는 모습들을 보면 책임감이 없어 보인다. 당시는 가부장제가 강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조르바의 여자관계나 말투는 비난의 표적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비춰보는 거울로 읽는 편이 낫다. 일부 남자들은 조르바처럼 살고 싶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성별 권력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작품의 초점은 ‘지금-여기의 집중과 책임’에 있다.

작품에서 말하는 자유는 톨스토이가 말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하는 쪽이다. 여자관계만 콕 집어서 비난하지는 말자. 젊은 과부를 죽인 동네 사람들(무지와 규율의 폭력성)과 나서지 못한 ‘나’(방관적 지식인)보다 귀를 뜯겨가면서 동네 사람들과 싸운 조르바를 비교해 보자. 자신은 조르바처럼 할 수 있는가? 무고한(조르바는 그렇게 생각했다.) 젊은 과부한테 폭력을 가하는 동네 사람들과 조르바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줄 수 있는가? 아무 조건이나 계산 없이. 젊은 과부는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

실존적 인간 조르바


조르바의 삶 전체에서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 그리고 아모르 파티Amor fati(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를 이해해야 한다.

조르바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다. 조르바는 오직 현재에 최선을 다했다. 과거나 미래에 정신을 두지 않았다. 오직 현재에 온몸과 마음으로 일하고, 밥 먹고, 사랑을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조르바는 구원자와 같았다. 조르바는 함께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나의 내면에 떨고 있던 추상적인 근심 걱정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육체의 옷을 입혀 주었다. 그가 없을 때면 나는 다시 추위를 느꼈다.
― 본문 284쪽(민음사)
조르바와 함께한 생활은 내 가슴을 넓혀 주었다. 그의 모든 말은 내 영혼에 안식을 주었으며, 가장 복잡한 걱정 근심도 단칼에 자르듯 쉽게 해결해 주었다. 정확한 직감과 독수리처럼 원시적이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는 나를 지름길로 인도하여 문제 해결의 정상에 이르게 했다. ― 다시 말해 누워서 떡 먹기처럼 아주 쉽게, 이렇다 할 노력도 없이 간단하게 정상에 이르는 지름길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 본문 513~514쪽(민음사)
나의 영혼은 극도의 광기가 ― 삶의 본질이 ― 부추기는 행동을 감히 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나는 살면서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조르바 앞에 있을 때만큼 자주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 본문 549쪽 작가의 말 중에서(민음사)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조르바는 말보다 몸으로 감탄하고 돕고 춤추며 사랑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지금을 산 것이다. 그때 ‘나’는 머릿속을 비우고 조르바와 함께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먹는 일, 밤하늘의 별을 보는 일, 춤을 추는 일이 실존에 꼭 필요한 요소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조르바가 “나는 타인에게 선한 일을 하겠어.”라고 다짐하거나 말해서 선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모모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선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조르바를 통해 머릿속에서 빠져나와 자기 존재의 자유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오르탕스는 조르바를 통해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물론 ‘나’의 거짓말이 잘못 작용하긴 했지만.)

—-

조르바다운 자기 수락까지


작가는 조르바가 살면서 깨달은 진리를 춤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머리로 사는 ‘나’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한다. 타인에게 욕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나를 욕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불가능하다.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유행을 했던 적이 있다.(아들러의 책을 직접 읽는 게 개인적으로는 훨씬 나았지만.)

현대인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매몰되어 있다. 미움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삶을 버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라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연적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조르바는 그것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자기의 삶을 통해서 깨달은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의 허물과 과거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거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은 채 지금은 그때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전쟁에서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던 과거를 통해 민족주의와 국가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조르바다. 종교의 가치도 각종 제도나 규율도, 존재를 억압하는 모든 체제를 비웃는 조르바다. 그렇다고 조르바가 무분별한 양아치처럼 사느냐?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처음 보듯 했고, 끊임없이 경이로워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기적처럼 보였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서 나무와 바다와 돌멩이와 새를 관찰하며 입을 쩍 벌리고 이렇게 외쳤다.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인가!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본문 280쪽(민음사)

조르바는 깨달음을 얻은 자와 같이 행동한다. 세상 모든 것에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아는 철학자의 눈을 가졌다. 모모나 어린 왕자처럼 말이다. 지금 자기 눈앞의 삶을 의식적(깨어 있는 눈)으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성찰한 삶이다. 진정한 자유와 용기가 그 삶에 있다. 내가 지금 글자를 쓰는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이 오로지 그 행위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삶이다.

—-

죽음도 조르바답게(아모르 파티의 정점)


조르바가 대단한 것은 자기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보여준 태도다.

유언이 끝나자마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인인 류바, 저, 그리고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은 ― 달려들어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분은 창틀을 거머쥔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먼 산을 바라보며 웃다가 말처럼 힝힝거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는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 본문 544쪽(스코피아(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1912년 발칸 전쟁 중,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에 병합되었다.)의 마을 교장, 알렉시스 조르바가 운영하는 마그네슘 광산의 교장이 보낸 편지 중에서)(민음사)

꼿꼿하게 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마주한 조르바다. 죽음의 순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만 가능하다.

“한 번 뿐인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일생으로 답했다.”

우당 이회영이 한 말이다. 온 몸과 정신을 흔드는 말이다. 조르바는 자신의 일생으로 답한 사람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나’는 조르바를 통해 자기의 일생을 마주보게 되었다.

—-

자기 자신한테서 먼저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도 비슷하다. 원효대사가 저잣거리에서 포교를 했을 때 자기의 신분을 벗어던졌고 계급적인 게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제한된 자유를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진정한 자유란 자기 몸부터 제대로 인지하고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자기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근심, 걱정, 기쁨, 짜증 등)과 몸의 변화를 예민하게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잘하지 못한다. 그런데 누가 조르바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라는 몸에서도 자유롭지 못한데 타자의 욕망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조르바는 그렇게 성장한 사람이자 성찰한 사람이었다.

“조르바, 나도 알아듣고 있다고요. 맹세코 말하는데, 난 아저씨 말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요, 보스는 이해하지요. ― 그런데 머리로만 이해하는 겁니다. 옳다/그르다, 이런 방식/저런 방식, 선/악, 당신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말해요.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떤가요? 보스가 말하는 동안 난 당신의 팔이며 발이며 가슴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생명이 없는 것처럼 침묵을 지킵디다. 그러고도 이해한다고 말하죠. 무엇으로 이해하나요? 바로 머리통이죠? 푸우!”
― 본문 398~399쪽(민음사)
“난 정말 뭔가 배운 바가 있소. 이제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거든. ‘이 사람은 선량한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그가 불가리아인인지 그리스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보기엔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이제 내가 던지는 질문은 말이오. 그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하는 것뿐이오.”
― 본문 403쪽(민음사)

우리는 매 순간 몸을 움직인다. 몸만 움직일까? 뇌에서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뇌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뇌가 우리 몸에 있는 것이라면 그 몸이 하는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

배움과 깨어 있음


다시 말하지만 조르바는 자기 삶을 살면서 매 순간 깨달음을 얻은 자다. 우리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깨달음이 있어야 경험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 없다면 몸과 생각이 무의식에 지배되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은 상태에 빠진다. 성찰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호랑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기둥을 내려온다. 호랑 애벌레가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애벌레들 속에 나비가 들어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처럼 인간은 자기 행동과 삶에서 깨달음을 통해 배워야 한다. 조르바는 자기가 온몸으로 깨달은 바를 실천하며 산 사람이다. 그래서 젊은 과부를 목숨 걸고 지킨 것이다.

물론 작가가 ‘나’와 조르바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설정해 둔 바가 있지만 실존 자체에 대한 깨달음을 전달하는 목적은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다른 말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찰과 깨달음은 말로 오지 않는다. 온몸과 세포로 온다. 그래서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말처럼.(헤르만 헤세 작품 『싯다르타』에 나오는 말. 원래는 『우파니샤드』에 나온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수 있다. 현실의 모든 규율과 억압적인 면에서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나 작가가 말하는 조르바가 다르지 않다.

나는 이따금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그 위대한 영혼을 되살려 내곤 했다. 우리는 함께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은 이 무식한 인간을 합리성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낸 확신에 찬 도약을 존경해 마지않았다. 쉽게 내뱉는 몇 마디 말로 그는, 다른 사람이라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고통스럽게 퍼부은 다음에야 닿을 지적인 정상에 단숨에 도달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곤 했다. “조르바는 위대한 영혼이야.” 아니, 정상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부르짓기도 했다. “조르바는 미치광이야.”
― 535~536쪽(민음사)

---

진정한 자유, 지금 여기를 사는 용기


동양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니체를 좋아한 작가다. 또한 시인과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실존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조르바를 부러워했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조르바도 세상을 놀라워하고 기적처럼 느꼈다. 작가는 그런 상황을 묘사할 때 시적인 표현으로 문체를 이루어간다. 작가의 문체를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은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에 대해서 가차 없는 조르바를 통해 작가는 실존에 대한 책임과 용기를 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보다는 『싯다르타』와 『데미안』을 더 좋아하지만 작가가 조르바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 되고자 했던 작가가 아닌가. 그래서 그의 묘비명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가 아닐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말한다. 현대인은 그렇게 살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삶인지 아닌지는 죽음 이후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진심으로 소중하고 경이로운 것이다.

내가 성찰의 순간을 경험했을 당시, 나라는 존재 자체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도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미성숙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불가능하다. 이미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나비를 품고 있다. 작가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바라본다. 진정한 자유인이란 성찰한 인간, 성숙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온몸으로 답하고(행동), 결과를 스스로 떠안으며(책임), 주어진 운명까지 “예스”라고 받아들이는(인정과 수락) 힘(용기)이 바로 진정한 자유다. 조르바가 그렇게 산 존재다.

주어진 운명을 신이 준 것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주어진 운명이란 삶을 의미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것 자체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왜 인간으로 태어났냐, 왜 한국인으로 태어났냐, 왜 이런 부모한테서 태어났냐는 자기가 바꿀 수도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투정만 부리고 징징대고 남에게 의지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라는 의미다.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홀로서기를 하라는 의미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만들고 바꾼다. 다른 생명들은 오직 현재만 산다.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처럼 산다. 그래서 미래를 바꾸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드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깨닫는 자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사실을 알아야 하며, 그것은 결국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사랑에는 두려움도 기대감도 없다. 사랑만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바로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스인조르바 #니코스카잔차키스 #고전명작 #도서리뷰 #자유인 #그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