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라는 이름의 족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리뷰 | 알랭 기로디 감독

by 데미안에너지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미세리코르디아-4컷.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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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었는데 무서웠다


보는 내내 웃었다. 제레미, 신부, 빵집 주인의 부인 마르틴과 아들 뱅상, 과거 친구 왈테르, 경찰들까지. 제레미는 엉성하고 이상한 고집스러움이 있다. 신부는 겉과 속이 아주 달라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르틴은 소유욕이 강하고 아들 뱅상은 질투심이 있다. 과거 친구 왈테르는 감정적이다.

영화는 논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점점 올라오는 서늘함에 감정의 잔여물이 무거웠다. 비명을 지르지 않아서 더 무서운 영화였다. 불편한 감정의 가장자리를 물들이는 환경이 영화 속에서 버섯이 자라는 습한 온도와 닮았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Misericordia’는 라틴어라고 한다. 프랑스 영화지만 감독이 라틴어를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miser : 불쌍한, 비참한
cor/cordis : 마음, 심장
→ misericordia = 불쌍한 이를 향한 마음(심장)

즉,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마음’이라는 뉘앙스를 지닌 단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자비’를 뜻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그 자비가 진짜인지, 위선인지, 욕망의 다른 이름인지 관객에게 묻는다. 인간의 도덕성과 욕망, 폭력과 용서 사이의 복잡한 긴장을 상징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자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위선, 공모, 욕망의 면죄를 비판하고 있다. “진짜 자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오히려 진짜 자비가 부재한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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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레미-죄책감 속의 침묵자

제레미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침묵으로 일관한 듯 보인다. 제레미가 자유로워 보이는 곳은 숲이다. 버섯을 찾으러 다니는 숲이 제레미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영화에서 제레미가 마을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마을 공동체의 포획물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레미는 처음엔 자신의 젊음과 외모, 매력으로 마르틴, 신부, 왈테르의 관심과 감정적 빚을 얻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자신의 ‘상품성’에 포획되고, 마을 사람들의 욕망과 죄책감의 수단이자 도피처, 혹은 희생양이 되어간다. 너무나도 엉성하고 허술한 제레미를 도와주는 주변인들이 그를 소유하기 시작한다. 제레미는 ‘구속적 자비’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너를 도와줄게”라는 말은, 사실상 “우리가 널 소유하겠다”는 선언이 되어버린다. 제레미는 마르틴의 아들 뱅상을 죽이고 분명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떠나지도 않고, 고백도 하지 않는다. 제레미는 도망가는 대신 공동체에 스며든다. 주변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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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부-자비를 가장한 감정적 포획자

신부는 살인을 알면서도 제레미를 도와 알리바이를 만들어준다. 그런데 그것은 신의 자비가 아니라, 제레미에 대한 은밀한 집착과 통제의 수단이다. 신부는 ‘용서’를 가장한 포섭의 윤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레미는 살인으로 더 얽히고 더 깊은 속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부와 제레미가 뱅상의 시체를 옮길 때 신부의 모습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신부는 제레미처럼 급박해 보이지 않았다. 뱅상을 없애기 위해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데려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뱅상도 제레미처럼 신부의 자비? 아래 있었던 대상이 아니었을까? 뱅상은 제레미처럼 마을을 떠났던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신부와 꾸준히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신부가 뱅상을 옮기면서 보인 감정은 죄책감, 집착, 소유의 미련, 정서적 관계의 잔해에 가깝다. 그러니까 신부에게 제레미는 ‘지금 소유 대상’이고, 뱅상은 ‘이전의 소유 대상’이 아니었을까? 결국 신부는 자신의 자비 아래에 남자를 끌어들이고, 끝내는 파멸시키는 구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신부는 제레미한테 거리를 두면서 버섯을 통해 소통하며 시간을 들인다. 성급하지 않고 서서히 감정적으로 약해지는 제레미를 기다린다. 신부는 자신의 권위, 도덕, 종교적 언어를 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감정적으로 타인을 지배하고 복속시키는 인물이다. 뱅상을 숲에서 교회로 옮긴 행위는, 죽은 자를 완전히 나의 소유로 되돌리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신부는 구원을 가장한 파괴로 제레미를 완전히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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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르틴-정서적 흡착자

마르틴은 남편을 잃고 제레미를 정서적 대체물로 삼는다. 아들 뱅상보다 제레미를 더 감싼다. 뱅상은 그런 엄마를 걱정하면서 제레미를 경계한다. 과거 남편의 애제자였던 제레미를 알았고, 아들의 친구였던 제레미를 어린 시절부터 예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뱅상은 그런 제레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엄마의 사랑을 빼앗겼던 뱅상이 제레미에게 보이는 행동은 질투심을 넘어 엄마에 대한 집착으로 보였다.

마르틴은 아들이 사라졌는데 크게 놀라지도 않는다. 제레미를 의심하면서도 남편의 옷을 제레미에게 빌려주고 숙식까지 제공한다. 마르틴도 신부처럼 모든 비밀을 알지만 제레미를 놓지 못한다. 마르틴은 자비나 돌봄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흡착에 가깝다. 남편을 사랑한 제레미를 곁에 둠으로써 정서적 쓸쓸함을 채우는 집착에 가깝다. 남편을 잃은 상실을 보상받으려는 흡착과 같은 것이다. 자비라는 이름으로 제레미를 남편의 자리에 눕히는 무서움이 마르틴이 제레미에게 걸어놓은 족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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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왈테르-규범으로 옭아매는 자

왈테르는 제레미가 등장하자 경계와 관찰을 멈추지 않는다. 왈테르는 제레미가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다고 여긴다. 공동체에서 무언의 규범을 대변하는 시선을 왈테르가 보여준다.

왈테르는 제레미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호기심도 품지만 결국 동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제레미한테 총을 쏘며 폭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방인을 감시하면서 질서를 복원하고자 하는 왈테르는 제레미를 감정적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 감정은 폭력에 가깝고, 제레미를 제거하려 든다. 공동체의 도덕이라는 명분으로 이방인의 다름을 제거하려는 왈테르는 폭력으로 감정적 파국을 보이는 인물이다. 왈테르는 제레미를 사회의 경계선 밖으로 몰아붙인다.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지 못 하게 만드는 왈테르의 행동은 제레미를 죽이지 않고도 죽은 자처럼 만드는 권력으로 기능한다.

결국 제레미는 신부(자비), 마르틴(애착), 왈테르(질서)라는 세 겹의 포획 안에서 감금된 채 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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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침묵하는 윤리를 드러내는 거울


제레미는 감정과 사회, 윤리의 층위 모두에서 포획당한 존재다. 그는 자유롭게 떠날 수 없고, 남아 있는 한 ‘자비 받은 자’라는 마을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이는 영화가 말하는 ‘자비의 구조적 폭력성’, 그리고 공동체가 타인을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포획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Misericordia」는 ‘자비’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자비’라는 말로 가려진 욕망, 소유, 폭력의 은밀한 족쇄를 드러내는 영화다. 제레미는 죽지 않지만, 죽은 자처럼 ‘사회적 시체’가 되어버리는 인물이다.

감독은 ‘감정은 분명한데, 해석은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남겼다. 그런 방식으로 관객의 마음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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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균열이 나에게도 질문을 남겼다. 지금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양심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 믿음은 유효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듯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더 이상 양심이 아니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해준 영화다.

침묵은 죄보다 더 교묘하게 폭력을 돕는다. 제레미나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자각이 일어나게 해준 영화다. 양심이 감정에만 머무르고 행동하지 않을 때, 그것은 공범이 된다.

나는 이 영화가 양심이란 무엇이며, 침묵은 어떤 방식으로 구조적 공포를 만들어내는지 체감하게 만든다고 느꼈다. 《미세리코르디아》는 자비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우리 안에 침묵하는 윤리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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