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 리뷰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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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기다렸다. 《판의 미로》,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보여준 델 토로 감독의 괴물은 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은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괴물을 창조한 자가 바로 괴물이었다. 빅터의 아버지가 괴물이었던 것처럼.
액자소설처럼 진행되는 서사가 긴장감을 주고 3막으로 나누어진 전개도 집중력을 가져온다. 빅터의 어린 시절 상처가 그 안에서 괴물을 키워 왔다. 빅터는 결국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 먹혀버리고, 모든 것을 부정한다. 빅터의 동생 윌리엄이 죽으면서 “괴물은 형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빅터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죽음이 닥쳐서야, 그것도 자기가 괴물이라고 부른 존재에게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으려 할 때가 되어서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 영화에서는 외형이 아니라 타자화, 혐오, 배제가 악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괴물의 본성은 태생이 아니라, 관계의 실패에서 생긴다. 빅터가 만든 피조물은 맹인 할아버지와 아이를 통해 따스함을 배운다. 맹인이기 때문에 외형이 아닌 내면을 느낄 수 있는 할아버지는 피조물과 관계를 이어 나간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던 빅터가 무책임하게 만든 피조물은 맹인 노인과 아이의 순수성에서 관계의 소중함과 가족의 따스함을 배운다. 창조자 빅터는 피조물을 죽이려 했으나 아무 관계도 없는 맹인 노인과 아이가 피조물을 돌보려 했다는 점이 영화에서 역설로 작용한다.
괴물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이는 창조자가 아니라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맹인 노인이었다. 기존의 방식, 틀에 박힌 태도를 가진 사람이 보기엔 흉측한 존재였지만 노인과 아이의 사랑을 건네받은 순간, 그는 생명의 가치와 따스함, 돌봄과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창조자 빅터의 외부 환경은 남들이 봤을 때 좋아 보였을지 몰라도 그는 이미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폭발했을 뿐. 그가 피조물을 대하는 방식이 아버지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서 괴물은 인간성을 잃은 인간들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폭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이 영화 속에 흐른다.
괴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 구원받으며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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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권력이 아니다. 빅터가 만든 것은 생명이 아니라 무책임한 인간의 초상이다. 창조만 하고 양육, 돌봄, 책임을 포기한다면? 괴물이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공포보다 사랑 없이 존재를 만들어내기만 하는 폭력에 초점을 맞췄다.
광기에 물들어 있는 빅터는 무기 상인 하인리히 하를란더의 후원을 받아 피조물을 만든다. 그 과정이 영화에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굉장히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다. 책임감이나 윤리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창조자라는 권력에 미쳐버린 빅터의 모습은 현대인을 떠오르게 했다. 만들기만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현대인들의 폭력성 말이다. 과학의 발달로 수많은 기계를 만들었고 쌓이는 쓰레기가 우주에도 넘쳐난다. AI에 대한 윤리적 규범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 이득만 따진다.
20세기 초반 창조를 다룬 영화지만 인간의 괴물성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만든 영화다. 부모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보다 중요한 것은 돌봄이다. 무책임한 창조는 파괴와 폭력이다.
빅터는 죽음을 맞기 직전 “나는 너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널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영화는 신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책임을 인식한 인간의 슬픔과 돌보는 손의 체온을 말한다.
엘리자베스, 맹인 노인과 아이가 피조물에게 다가가 손을 잡은 체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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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라는 비극
피조물은 단순히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말할 줄 알고, 기억하고, 사랑을 원하는 존재다. 그는 생명을 얻었지만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가 맞닥뜨린 첫 감정은 고립이었다. 족쇄에 묶인 손과 발, 존재하지만 누구의 세계에도 포함되지 못한 자의 비명, 죽을 수도 없는 초월적 신체!
어느 것 하나 피조물이 원한 것이 아니다. 창조자가 강제로 주입한 것이다. 피조물의 선택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그를 더욱 고독에 고립시킨다.
피조물의 고독이 증폭되는 시점은 따스했던 엘리자베스와의 만남이 끊어진 후, 노인과 맺었던 인간적 유대감이 마을 사람들과 늑대들의 습격으로 끊어진 후다. 빙원에 홀로 서 있는 피조물의 모습이 얼마나 고독해 보였는지, 지금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인간이란 고독한 존재다. 어쩌면 인간은 고독에서 태어나 고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이 위로와 돌봄으로 추억을 쌓으면 그나마 견딜 수 있겠지만 고통으로 변한다면 비극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빛과 온기를 머금고 서로를 보듬고 있는가?
피조물은 분노 속에서 살게 되고, 외로움이 증오로 변하면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괴물과 엘리사는 사랑으로 고독을 이겨낸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사랑이 없다. 빙원에 갇힌 인물들처럼. 오히려 피조물이 인간의 배를 빙하에서 구해주는 장면에 사랑이 담겨 있다. 어찌 보면 피조물 자체가 사랑을 실천하는 게 아닐까?
신이 자기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믿지 않는다. 외계생명체도 인간만 지구의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적으로 만드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인간이라는 고독의 비극을 끝까지 탐색해야 할 시간이라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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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괴물이 인간을 닮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의 괴물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두 존재는 서로를 증오하지만 결국 서로 닮아간다. 하지만 괴물은 빅터보다 인간적이고 빅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다르게 행동한다. 오히려 빅터가 괴물을 통해 자기 안의 괴물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에
“누가 밉다면 그가 나의 내부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에 없는 것은 나를 화나게 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라는 구절이 있다.
빅터가 피조물을 미워한 것은 사실 자기 안의 그림자를 미워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빅터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보면서 자기 안의 괴물을 보게 된 것이다. 피조물 또한 빅터의 그림자였으나 빅터를 용서하면서 그림자에서 벗어난다.
인간이 만든 괴물이 결국 인간 자신의 내면을 반사하는 존재임을 영화는 드러내고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생명을 조립한 빅터는 돌봄이 사라진 세상의 폭력을 닮았다.
괴물의 눈 속에 비친 인간과 세상, 인간의 눈 속에 비친 괴물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괴물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면되는 순간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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