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새해

2026년아 내게 오라

by 녕서
2026년 첫 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해 일출을 보고 왔다. 2026년의 시작은 뭔가 색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태양이 무슨 영험한 힘이 있겠냐만은, 사람이 다급해질수록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에 기도를 올리게 되더라.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더라도 유동인구가 많은 핫플에 장사를 해야한다는 것처럼, 누가 나한테 소원을 비는지 관심도 없을 4월 중순쯤의 떠오르는 해 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소원을 비는 그 순간의 태양, 인기쟁이가 된 그 순간의 태양에게 소원을 빌고 싶었다. 이 수많은 소원 중에 나 한명도 잠깐 봐달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한국이 괜히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게 아니었는지, 영하 10도를 웃도는 한파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은 일출을 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산을 오르는 근면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낭만적이고 성실한 줄 몰랐다. 주차난을 예상하고 일출 시간 한 시간 전에 미리 갔는데도,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고 좁은 산길을 삥삥 돌았다. 다행히 큰 주차 부지를 가진 대형 베이커리 카페를 발견했고, 뜨거운 유자차와 고구마차 한 잔씩을 15,000원에 사고 주차장 한 칸을 얻어냈다.


원래는 수어장대라는 전망대에서 탁트인 전망과 함께 일출을 보려했다. 그런데 주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탓에 일출 시간은 30분 앞으로 다가왔고, 수어장대까지 가다가는 일출을 놓칠 것 같아 가까운 서문 전망대로 노선을 틀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서문 전망대에는 이미 또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차지하고 서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애매한 계단 난간쪽에 서서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봐야 했다.


과정이 어찌되었던 간에 어쨌든 새해 일출을 보는 데에는 성공했다.


새해 냠냠굿


새해 일출을 본 뒤에는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러 가려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에 연 바지락 칼국수 집이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나마 찾아 간 집 근처 분식집도 공휴일이라는 이유로 영업 시간이 늦춰졌다며 우리를 내쫓았다. 어쩔 수 없이 차로 다시 10분을 달려 다른 분식집을 갔다. 그런데 알고보니 바지락 칼국수를 파는 집이었고, 맛 또한 기가 막혔다. 태초에 세운 계획과는 양상이 달랐지만 어쨌든 뜨끈한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싶다는 계획은 달성했다.


아담스 꼬마김밥 칼국수 정말 맛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2025년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겐 참으로도 암흑기 같은 한 해가 저물었다. 어찌보면 그동안의 나는 너무나도 평탄하고 원하는대로 착착 이뤄지는 삶을 살았던 것일수도 있겠다.


내신 성적으로는 가기 어려웠던 대학교에 최종합격을 했고, 꿈에만 그렸던 회사에서 첫 인턴 생활을 했고, 누구나 부러워 할 대기업에서 두번째 인턴 생활을 했고, 유럽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해외에서 세번째 인턴 생활을 했다. 수상하리만치 행운의 여신은 늘 나의 편이었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갑자기 찾아온 불행의 연속은 주인을 잘못 찾아온 택배 소포처럼 느껴졌다. 이 택배가 다시 제 주인을 찾아 나에게서 떨어졌으면 했는데, 알고보니 주인을 제대로 찾아온 택배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즈음 이미 나는 수취인불명 택배에게 시달려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연초에는 해외 인턴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열심히 살아왔으니, 분명 나에겐 그만큼의 적당한 명예와 돈을 가져다줄 직업 또한 쉽게 가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 세상에 훨씬 많다는 것과, 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의자뺏기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의자뺏기 게임



엎친 데 덮친 격, 첩첩산중, 설상가상이라는 옛말이 스스로의 실존 이유를 뽐내보이듯 안 좋은 일에는 꼭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난생 처음 지갑을 잃어버려서 가진 카드를 몽땅 재발급 해야 하는 일이 생기질 않나, 알바하다가 손님한테 폭언을 듣고 고소를 하질 않나, 전형 일자를 착각해서 시험 응시를 못하질 않나, 원인 불명의 급성 편도염으로 죽다 살아남아 수액을 맞질 않나 -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별의별 일이 내 삶에 자꾸 끼어들었다.


낄끼빠빠 모르니?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나쁜 일들이 반드시 나쁜 일로만 남지는 않았다. 지갑을 분실했지만 곧바로 알아차린 덕에 어떠한 경제적 손실도 입지 않았고, 모욕죄로 고소를 진행한 덕(?)에 예상치 못한 큰 돈의 합의금을 받았다. 긴긴 취업 전형들을 거치며 나의 부족한 점과 남들보다 뛰어난 점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크게 아프고 난 후로는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양제를 열심히 챙겨 먹기 시작했다. 모든 나쁜 일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한 해였다.




새해 일출을 보겠다는 목표, 새해 첫 해를 본 후 뜨끈한 바지락 칼국수를 먹겠다는 계획은 모두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모든 계획들은 지켜졌다. 주차난과 자리 이슈가 있었지만 어쨌든 붉게 타오르는 새해 첫 해를 내 눈으로 담아냈고, 소문난 맛집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맛있는 바지락 칼국수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어떻게 계획대로 되는게 하나 없냐- 싶을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차저차 원하는 바는 이뤄낸 새해 첫 날이었다. 아마 2026년 한 해도 이렇게 어찌저찌 흘러가다 보면 결국 내가 원하는 곳에 다다르는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내가 생각한 정석의 루트는 아니더라도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름길을 발견할 수도 있고, 돌고 돌아 가는 여정속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결국엔 나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쨌든이다 어쨌든.

어쨌든 새로운 해가 떴다.

어쨌든 잘 살아보자!